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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한국에서 오랜 기간 강의해 온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광복회 학술원 프로그램인 청년 헤리티지 아카데미 강연에서 일본의 과거 역사적 잘못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히며 절을 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9년이 지났는데도, 역사 문제가 여전히 말끔히 해결되지 않은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도리우미의 사죄의 절은 강연에 참석한 한국인들에게 생경한 풍경이었다.
 
 8월 10일 광복회 학술원 청년헤리티지 아카데미 강연에 앞서 대구 가톨릭 대학교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본의 역사적 잘못에 대해 사죄의 절을 올리고 있다.
 8월 10일 광복회 학술원 청년헤리티지 아카데미 강연에 앞서 대구 가톨릭 대학교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본의 역사적 잘못에 대해 사죄의 절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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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우미 교수는 20년 전 한국에 정착해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도리우미 교수는 강연에서 일본 정치인들이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사과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이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이러한 왜곡된 인식이 일본 사회에 퍼져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여러 역사 자료를 조사하며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 인해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도리우미 교수는 "일본은 조선 사람들, 즉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의 역사적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과거의 악행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강연에 참석한 한국인들에게 사죄하는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과거의 악행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강연에 참석한 한국인들에게 사죄하는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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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시작에 앞서 도리우미 교수는 "저는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의 첫 걸음이라고 믿습니다"라며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대표해 한국인들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후,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도게자(土下座)라고 하는데, 일본 문화에서 도게자는 매우 드문 경우에 사용되는 의식적인 행위로, 특히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할 때 주로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절대 빈곤이 식민지 근대화론 반박할 근거"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본의 수탈론에 대해 광복회 청년 헤리티지 강연에서 설명하고 있다.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본의 수탈론에 대해 광복회 청년 헤리티지 강연에서 설명하고 있다.
ⓒ 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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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우미 유타카 교수의 이번 강연의 주제는 일제 강점기 경제의 실상이었다. 그와 관련된 두 가지 주요 관점을 다루었는데, 이 두 가지 관점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적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중요한 주제들이다.

'수탈론'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로, 일본이 조선에서 막대한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자산을 수탈해 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의 자원을 강탈해갔고, 그로 인해 조선은 극심한 빈곤과 고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일본이 조선에서 강제로 각종 물자를 징발하여 가져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실상을 광복회 청년 헤리티지 강연에서 설명히고 있다.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실상을 광복회 청년 헤리티지 강연에서 설명히고 있다.
ⓒ 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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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이 식민지 시절 조선에 많은 자본을 투자했고, 그 결과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견해를 강조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로 인해 한국은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무리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일본의 경제적 투자가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리우미 교수는 이러한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균형 잡힌 이해를 제시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여전히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이 자금을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정 부분 사실일지라도, 그 자금의 대부분이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들이 경제적 혜택을 독점한 구조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인들이 근대화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도리우미 교수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자금이 유출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이를 장악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의 자본 투입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는 일부 진실이 담겨 있지만, 그 혜택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식민주의, 다른 국가의 식민지 지배보다 더 처참하고 잔혹
 
 8월 10일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광복회 청년헤리티지 아카데미 강연에서 세계 식민주의와 비교하며 일제 식민지가 훨씬 가혹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8월 10일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광복회 청년헤리티지 아카데미 강연에서 세계 식민주의와 비교하며 일제 식민지가 훨씬 가혹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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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우미 유타카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일본 식민주의가 다른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처참하고 잔혹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다른 식민지 사례들과 비교해 설명했다.

도리우미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국은 자치주의를 채택해 식민지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으며,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으며,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와 문화를 크게 침해하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은 동화주의에 기반하여 식민지 주민들을 프랑스 사회에 동화시키려 했지만, 일정한 노력을 통해 프랑스 내에서의 지위 상승을 가능하게 했다.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프랑스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에 따라 알제리 주민들 중 일부는 프랑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은 조선에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동화 정책을 강요하면서도 조선인을 완전히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일본어 사용과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전통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동시에,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경제적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혜택은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독점했다.

도리우미 교수는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억압적이고 잔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주의가 세계적인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가혹했다고 평가하며,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다른 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해도 훨씬 처참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특히, 도리우미 교수는 일본이 다른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해 더 많은 투자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잔혹한 통치였으며, 이는 한국의 역사적 기록들에서 잘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결국, 도리우미 교수의 강연은 일본의 식민주의가 다른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음을 보여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단순히 경제적 투자를 통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잔인한 통치였음을 분명히 했다.

일제강점기 토목공사와 조선인 노동자 착취의 실상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제 강점기 토목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착취 당했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가 일제 강점기 토목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착취 당했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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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우미 유타카 교수는 최근 강연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이 조선에서 진행한 토목공사와 관련된 실상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당시 막대한 자금이 조선에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일본인들의 경제적 독점과 구조적 착취로 설명했다.

도리우미 교수는 당시 조선에서 진행된 토목공사 입찰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배제된 사실을 지적했다. 일본인 토목업자들이 공사를 독점했으며, 조선인들이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배제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으며,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경제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결과였다.

당시의 입찰 제도는 일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었으며, 조선인 토목업자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인 회사들은 입찰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인들의 참여를 배제했고,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또한, 도리우미 교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극도로 낮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에 100전 정도를 받는 것으로 통계에 나타나 있지만, 실제로는 하루에 30전 정도만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착취당했음을 보여준다.

도리우미 교수는 이러한 착취가 단순히 임금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사 현장에서 전표를 지급받았고, 공사가 완료된 후에야 그 전표를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공사 완료까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더욱 불리한 경제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도리우미 교수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이 조선에서 진행한 토목공사가 조선인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오히려 일본인 토목업자들이 대부분의 이익을 독점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은 극심한 착취에 시달리며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반일 종족주의' 출판한 학자들과도 논쟁  
 낙성대경제연구소 뉴라이트 학자들이 저술한 반일 종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책 표지
 낙성대경제연구소 뉴라이트 학자들이 저술한 반일 종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책 표지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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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우미 유타카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 책들을 출판한 뉴라이트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의 일화도 공유했다. 그는 그 연구소 학술회의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이 조선에서 저지른 부정적인 행위들에 대해 논의하며, 일본이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도리우미 교수는 예상치 못한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발표 후, 연구소 측에서 나온 반론은 도리우미 교수의 연구가 미약한 자료에 근거해 일본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참석자는 "일본이 그렇게 나쁜 나라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도리우미 교수의 연구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도리우미 교수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자료와 증거를 바탕으로 일본의 부정적인 행위를 비판하며, 자신의 연구가 정당함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의 일부 연구자들은 일본을 옹호하며 도리우미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일부 한국인 연구자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고 도리우미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당시 일본을 이렇게까지 옹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도리우미 교수는 논쟁 중에도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유지했다. 그러나 연구소 측의 일부 반응이 너무 과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연구자는 도리우미 교수에게 "더 공부를 해야 한다"며 그의 박사논문조차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공격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도리우미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일화를 통해 도리우미 교수와 같이 일제강점기의 부정적인 측면을 철저히 파헤치고자 노력하는 일본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지식인들로 구성된 낙성대경제연구소가 반일 종족주의를 내세우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도리우미 교수는 그들의 학문적 노력을 높게 평가하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후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복회#청년헤리티지아카데미#도리우미유타카교수#일제강점기경제의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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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백기환 선생의 증손녀. 할아버지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사회 발전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증조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진천부대 대장으로, 압록강 인근에서 활동, 서로군정서와 협력 1920년 평양 경찰서 폭파에 가담해 7년간 옥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해 독립신문 배포, 1945년 평양 군사시설 폭파에 참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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