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 얼마나 걸었는지를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다. 올 1월부터 연구 학기를 맞아 서울 어머니 댁에 머물렀다. 나의 걸음 수는 어렵지 않게 목표를 달성했다. 대중교통의 역할이 컸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출퇴근 시간을 피해도 되는, 팔자 좋고 건강한 사람에게 서울 지하철은 천국이다. 비용도 저렴하고 깨끗하고 안전하다. 약냉방 강냉방까지 선택해 탈 수 있다. 웬만한 책 한 권은 일주일이면 이동 중에 읽을 수 있다. 갈아타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건강을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연구학기 동안 한 일이라고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책과 노트북을 싸들고 인근 카페나 도서관으로 나간다. 독립적인 서재가 주는 안락함도 좋지만, 타인의 움직임, 그들이 내는 소리가 싫지 않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인턴>의 초반부에, 사별하고 정년퇴직을 한 주인공이, 매일 아침 7시 15분에 스타벅스에 나가 신문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분주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주인공은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다는 것, 적당한 숫자의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의 조건 중 하나다. 코로나가 창궐했던 시기와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타인은 때로 지옥이지만, 그 타인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생존한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걸 원 없이 체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을 위한 저렴하고 소박한 숙소다. 4명에서 10명, 20명이 함께 자야하는 그곳에서는 2~3일에 한 번 꼴로 폭탄을 만난다. 누군가가 밤새 엄청난 소리로 코를 골고, 이를 갈고, 스마트폰을 켜고, 과자를 먹는다. 귀마개도 소용없다.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날 컨디션까지 엉망이 된다. 하지만 다시 간다 해도 호텔 대신 알베르게에 묵을 것이다. 힘든 길을 함께 걷고 함께 밤을 보냈다는 연대감과 친밀감이, 타인과 공유하는 공간에서 생겨난 온갖 지옥 같은 상황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혼자 떠난 길이었지만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았고, 그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내 삶과 존재의 지평이 입체적으로 확장된다고 느꼈다. 그건 꽤 뿌듯한 느낌이었다.
연구학기 초반 나의 몇 달은 서울과 외국에서 원 없이 걷고 대중교통과 공공 시설을 주로 이용하며 몸을 움직이고 누군가와 접촉했던 건강하고 활발한 시간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다.
더위와 함께 찾아온 변화
7월 초,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충주로 내려왔다. 방학을 맞이한 캠퍼스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동료와 학생들이 사라진 건물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충주라는 큰 섬에 혼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장보기도 싫고 밥 해 먹기도 귀찮아서 식사를 대충 때웠다. 때 마침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다.
충주에는 지하철이 없다. 인구 20만의 중소도시에서의 삶은 차 없이 불가능하다. 자차로 이동하고,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주차하고, 사무실에 한 번 올라가면 퇴근할 때까지 꼼짝을 안 한다. 해 진 다음에라도 좀 걸으며 몸을 움직여야지 했던 생각은 후끈한 공기 앞에 곧바로 꼬리를 내린다. 서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하루 몇 만보씩 걸었던 내 보행본능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한 달 사이에 내 몸은 완전히 다른 몸이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더니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제대로 챙겨 먹고, 체육관이라도 등록해서 걷지 않으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추슬러 병원 진료를 받고 밥과 약을 챙겨 먹으며 생각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날씨나 사회적 환경의 변화 앞에 얼마나 취약한가? 내가 이럴진대, 이 더위에, 자동차가 없고, 운전을 할 수 없고,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로 출근할 일이 없는 사람들, 체육관이라는 대안이 없는 사람들, 특히 혼자 생활하는 고령의 약자들은 이 시기를 어찌 견딜까? 서울의 노인들은 공짜 지하철을 타고라도 몸을 움직이며 더위를 피한다는데 인구 20만 중소도시의 지역 노인들은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비로소 폭염이라는 것이 수해, 산사태, 코로나처럼 재앙일 수 있으며,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폭염의 그림자
1995년 7월 14일부터 20일 사이, 미국, 시카고에서 739명이 사망했다. 직접적 원인은 폭염. 섭씨 41도로 치솟은 기온이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고 해도 시카고라는 대도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eineberg) 뉴욕대 교수는 그의 저서 <폭염사회>에서 시카고 폭염 사망사고를 분석했다. 그의 연구 결과, 사망자 숫자는 각 지역 독거노인의 수와 빈곤층 수 등 인구통계학적 요소와 정확히 연동된다. 이들이 사망에 이른 결정적 원인은 폭염이 아니라 낙후된 지역 환경이 만들어 낸 가난과 고립이었다. 특히 폭력 범죄율이 높은 지역의 사망률이 높았다. 대낮에도 거리로 나올 수 없었던 그들은 집 안에만 머물렀고, 에어컨도 없는 집의 문과 창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던 장치가 폭염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앗아갔다.
클라이넨버그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독거노인의 비율이 높고 그들의 주거 환경이 열악할지라도, 커뮤니티 내에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적 시설이 있고, 그 곳에서 일하는 관리인, 사회복지사, 경찰, 소방대원들이 수시로 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한 경우에는 사망자의 숫자가 확실히 줄었다. 결국 폭염에 의한 참사의 근본적 원인에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과 국가와 사회가 구축했어야 할 공적 시스템의 붕괴가 있었다.
내게는 혼자 사시는 고령의 어머니가 계시다. 어머니의 아파트 단지 내에는 잘 정비된 둘레길과 노인정이 있다. 맨발로 걸으면 좋다는 흙길도 있다. 어머니와 동네 친구 분들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한 번씩 둘레길을 걸으며 우연히 만나고, 일주일에 몇 번은 노인정에 들려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한다. 어머니가 며칠 보이지 않으면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오거나, 누군가가 식혜와 호박죽을 가지고 직접 찾아온다.
주거 지역 안에 쉽고, 편하고, 안전하게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적 공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가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노인들이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나는 앞집에 사는 가족과 어쩌다 하는 눈인사가 전부인데, 어머니는 이웃들과 튼실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계셨다. 든든하다.
폭염이 이어지자 이 모든 것들도 예전 같지는 않다. 우선 어머니를 포함 지인 분들의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분주히 오간다. 곧 이 더위가 물러가면 다시 둘레길에서, 노인정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김승섭은 그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리사 버크먼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버크먼은 결혼 상태, 친구나 친척 관계를 나타내는 사회성, 교회에 다니는지, 지역사회에서 다른 조직 활동을 하는지 등을 측정해 사회적 연결 (social connection)의 정도를 등급화하고 그에 따라 사망률의 차이를 비교한다. 그 결과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사회적 관계망에 따라 1.8배에서 2.7배가량 사망률에서 차이가 있다는 게 밝혀진다. 더 많이 연결되어 있을수록, 더 오래 산다는 결과이다.'
-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257-258쪽
어머니의 노년과 삶을 지켜보며 나의 노년을 상상한다. 가능한 오래오래, 내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누군가와 만나고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걸 가능하게 해 줄 공적 공간과 노년의 시간을 함께 건너갈 수 있는 이웃, 친구, 관리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