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은 일제 강점 36년을 종식시킨 날로, 우리 민족에게는 환희였고 감격의 날이었다. 일제는 무력으로 민족의 저항을 탄압했고, 때로는 회유하며 강점을 정당화하려 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민족성을 말살하려고까지 했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등 대륙침략을 본격화할 때 민족 정체성 말살이 극대화되었는데, 이 시기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황국신민서사라는 맹세만을 만들어 암송하도록 했고, 학교나 신사 등에 황국신민서사를 새긴 비석이나 탑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에게 황국신민서사탑이나 황국신민서사비는 증오의 대상이면서 청산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상징이었던 황국신민서사비(황국신민서사지주)는 해방 후 해방기념비나 독립기념탑 등으로 재활용해 탈바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철거하거나 땅에 묻는 등 훼손시켰다. 이중 땅에 묻거나 방치되었던 황국신민서사비가 재개발 과정에서 또는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우연히 발견돼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도
1995년 9월 대전 산내초등학교에서는 홍수로 패인 운동장에서 황국신민서사비가 발견되었고, 2019년 대전여고에서도 교사 신축 공사 중 구관(옛 본관) 앞 화단 속에서 엎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지난 5월에는 충남 당진 면천읍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황국신민서사비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곳은 과거 면천초등학교 부지였던 곳으로, 학교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발견된 서사비는 박물관 등으로 옮겨져 전시되거나 발견된 현장에 전시하기도 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우리에게 얼마나 잔악했었나를 일깨워주고, 아직도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는 일본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아 일부러 비스듬히 눕혀 전시하는 일명 '홀대전시' 방식으로 전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전 산내초등학교에서 발견된 비석을 1997년에 한밭교육박물관으로 옮겨와 야외전시장에 비스듬히 눕혀 놓았고, 대전여고에서 발견된 비석도 2023년에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그곳으로 옮겨와 눕혀 전시해 놓았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가 무관심 속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지난 2012년 11월에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한 농장에서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는 옛 대천역 자리에 보령문화의전당이 들어서면 그곳에 '홀대 전시'를 할 거라 예고했으나, 야외주차장 옆 잔디밭에 안내판도 없이 그냥 눕혀져 있어 조경용 돌덩이로 착각이 들었다. 그곳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어떤 비석인지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다.
특히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라고 쓰인 부분이 바닥을 향하고 있다 보니, 가까이 가서 확인해도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皇紀二千六百年記念(황기2천6백년기념) 뿐이어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황기(皇紀)는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하는 일본의 기년법으로, 황기 2천 6백년은 1940년을 의미한다. 일제는 1940년에 황기 2천 6백년을 기념해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하고자 내세운 내선일체(內鮮一體) 표어와 함께 대대적인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학교에 황국신민서사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서사비가 발견된 월전리의 농장은 일제강점기 월전간이학교가 자리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세워진 서사비로 추정된다.
2015년 4월 12일(신문보도 4월 13일자) 중도일보 보도를 통해 확인된 예산 황국신민서사비는 현재 발견된 장소에서 사라진 상태다. 비석이 발견된 곳은 신례원초등학교와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일제강점기 신례원국민학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진 비석을 찾기 위해 신례원초등학교와 예산군청에 문의하였으나 두 곳 모두 소재를 알지 못했다. '다음 로드뷰'를 확인한 결과 2015년 11월에 이미 사리진 상태였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 최기섭 위원장은 "충남지역에서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최기섭 위원장은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무조건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며 "일제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식민 지배에 순응하게 하려했던 치욕의 역사를 알게 하는 교육 자료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역사교육을 전공한 윤세병 공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아우슈비츠, 냉전 시기 미국이 수소 폭탄 실험을 했던 남태평양의 비키니 환초는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며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이 유산이 아니라 불편한 과거사를 보여주는 유산 역시 의미 있다고 본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황국신민서사비도 보존해서 많은 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통일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