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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조팔사품’ 목록을 8폭 병풍에 재현한 그림. 통영 제승당 내에 전시되어 있다.
 명조팔사품’ 목록을 8폭 병풍에 재현한 그림. 통영 제승당 내에 전시되어 있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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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에서 받드는 여덟 가지 물건이 있다. 이것은 명조팔사품이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이순신의 전공을 명의 황제께 아뢰어 황제께서 그 공을 인정해 이충무공에게 군통수권인 도독의 벼슬을 내리고 구리로 만든 도독인과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각 1쌍을 내려 숭장하고 전권토록 했다는 것.

지난 2002년 1월 25일 경남 창원뉴스에는 이순신 유품인 팔사품이 소개됐다. 보도에는 "보물 제440호로 지정된 이충무공의 명조팔사품이 오늘 마지막으로 공개된 뒤 영구보전을 위해 수장고에 보관된다"는 내용이었다. 재단법인 통영 충렬사는 "명조팔사품 8종 15개 품목이 부식이 빨라 훼손이 심해지자 영구 보존하려고 자동 습도 조절되는 수장고에 보관하고 대신 모조품을 진열한다"며 전했다.

팔사품은 지난 1966년 국가 보물로 지정했다. 이 물품들은 도독인(都督印)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쌍을 이루는 총 15점이다. 그동안 통제영에서 이 물품들을 보관해 오다가 1896년부터 통영 충렬사에서 맡았고, 2013년 이후에는 통영시립박물관이 관리했다.

1969년 아산 현충사가 준공되자 도독 인장을 모조품으로, 나머지 유물은 각기 한 벌씩 아산 현충사로 옮겨 전시했다고.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명의 황제가 이순신의 무공을 치하하며 명의 도독으로 임명하려고 하사한 줄 여겼던 것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질 위기다. 이 팔사품을 두고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인지, 아니면 진린 도독이 이순신에게 준 선물인지를 입증하기 위한 세미나가 지난 2014년 통영시립박물관에서 열렸다.

조선과 명나라의 실록에 신종이 직접 내렸다는 내용이 없는 탓에 조선에 파견된 명의 장수 진린이 이순신에게 준 선물이라는 주장을 한편에서는 제기됐었다. 400년 묵은 미스터리를 중국 전각 전문가의 도움과 유물 고증을 통해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장경희 교수가 황제의 하사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장 교수는 그의 논문 '팔사품 연구'를 통해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고, 국내 유력일간지에 '이순신 팔사품,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 아니다'는 기사를 집중 다뤘다.

통영 역시 그 유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 교수가 제안한 세미나를 개최, 역사적 사실이 어떤지를 검증했다. 팔사품이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난 2012년 중국 류바오취안 산둥대 교수가 먼저 제기했었다.

중국 산둥대 한국학원 류바오취안 교수는 지난 2012년 8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열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K 사업단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 논문 '중국 문헌으로 본 임진왜란'에서 '팔사품'은 진린이 이순신의 가족에게 남긴 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팔사품에 대해 진린이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건의해 이순신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했지만 한·중 양국의 역사 문헌들에서는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또 명나라 신종실록에는 '조선의 신하 이순신에게 표창하도록 하라'고 기록됐지만, 명나라 조정은 그 어떤 포상도 내리지 않았다는 점, 이순신이 진린과 사이가 각별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팔사품을 진린이 남겼을 것으로 파악했다.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문집인 '상촌고(象村稿)'에 따르면 '진린은 통곡하며 부의하기를 매우 두텁게 했다. 들어가 영구에 곡하며 그 처자들을 조문하고 떠났다'며 기록됐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일까? 더 깊이 살펴보면 내용은 이렇다. 명나라 신종이 이순신을 도독에 임명하려고 도독인을 내렸다는 설은 1650년께 쓰인 김육의 신도비명에 처음 기록했다. 이순신을 칭송하는 내용인데, 출처가 명시돼 있지는 않다. 이후, 이순신 관련 책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

장 교수는 팔사품 중 일부가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이 아니라 이후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밝혔다. 영패를 넣는 주머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안쪽에 쓰인 글씨가 발견된 것.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표시하는 신유년 삼월 '申等新備 신등신비, 신관호 등이 새로 갖춤'이라는 글자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신유년은 1861년 철종 12년으로 신관호가 187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던 때다. 장 교수는 "영패는 당대의 유물이지만, 이를 넣는 주머니는 이후 새로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정조 때인 1795년에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기록과 현재 남겨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의 형태가 달라 이 역시 후대에 갖춘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이순신 관련 역사적 사실관계의 엇갈린 주장을 놓고 학술회의와 세미나가 빈번하다.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더라도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도군도 역사적 인물 관련해서 학술대회가 많아졌으면 한다.

장보고, 이순신, 원교 이광사, 완도군을 거쳐 간 첨사 등 재조명해야 할 자원이 많다. 이순신과 진린의 우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들은 이미 알려진 바 고금도에는 두 사람의 인연이 매우 깊다. 하지만, 통영 제승당이나 해남의 산이면 황조마을처럼 그들을 재조명하는 것에 완도군의 관심이 적은 것 같다.

지난해 묘당도 이충무공 가묘에 관한 학술세미나의 역사적 근거 제시에서도 느낀 바가 크다.

남해 충렬사에도 이순신 가묘가 있다. 지난해 개최한 학술대회 자료대로면 그곳에도 이순신의 유구가 있을 리 없다. 노량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후, 해로를 통해 고금도로 이동해 육로를 통해 다시 충남 아산으로 운구행렬이 기록에 의해 밝혀졌으니, 이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오류는 언제나 있는 것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역의 자원으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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