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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연애를 한다고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말했다. 연애를 못 하는 사람 또는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나는 말했다. 연애를 못 하는 전자는 나와 고래이고, 연애를 하면 안 되는 후자는 부모님과 동생 내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피오르라인 페리 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여행을 한다.
▲ 피오르라인 페리 사람들은 설레기 위해 여행을 한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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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런 건 처음이야."

캠핑카가 커다란 페리에 실렸다.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거니까. 그래도 처음은 언제나 두렵고, 그 두려움에 비례하여 설레는 마음도 커진다. 캠핑카에서 자는 것도 처음이지만, 페리에서 잠을 자는 것도 다들 처음이었다.

배 안은 신기한 것 투성이

주차를 마친 후 16시간의 항해 동안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선내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낯선 장소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상 불가능한 장소가 주는 설렘보다 휠체어가 움직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까 봐 더 두렵기 때문이다.

캠핑카는 DECK 3에 실렸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DECK 4부터 운행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이런 건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업힐 때마다 자식들이 힘들까 봐 마음이 무거웠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업을 때마다 너무 가벼워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 몸으로 가족들을 지켜내고, 자식들을 키워내셨으니, 아버지는 계단 한 층이 아니라 이번 여행 내내 자식 등에 업혀 다니셔도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로 아버지를 업고 다녀야 하는 곳은 없었다. 북유럽은 분명히 선진국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힘들까 봐 마음이 무거웠고, 자식은 아버지가 가벼워서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자식이 힘들까 봐 마음이 무거웠고, 자식은 아버지가 가벼워서 마음이 무거웠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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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르라인(Fjordline) 페리는 관광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크루즈 같은 서비스 시설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국제선 페리를 타는 일이 처음인 우리 가족에게는 페리 여행도 크루즈만큼 좋았다.

예약한 선실의 위치와 가까운 엘리베이터 위치를 확인한 후 페리 투어에 나섰다. 나는 몇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부모님은 배를 돌아보며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배 안에 리셉션이 다 있네. 신기하네… 배 안에 스타벅스가 다 있네. 신기하네… 배 안에 카지노가 다 있네. 신기하네… 배 안에 놀이터가 다 있네. 신기하네…"

페리 내부 리셉션부터 놀이터까지 불편함이 없었던 피오르라인 페리
▲ 페리 내부 리셉션부터 놀이터까지 불편함이 없었던 피오르라인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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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말씀 "이 큰 배에 휠체어 탄 사람이 나밖에 없네. 출세했다."
▲ 아버지 말씀 "이 큰 배에 휠체어 탄 사람이 나밖에 없네. 출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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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이대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좋아하실 것 같았다. 우리는 분명히 30분 전까지만 해도 페리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동생의 운전 실력에 우리 여행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단 30분 만에 지옥행 캠핑카에서 천국행 페리로 바꿔 탄 것이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았다. 여행의 8할은 날씨다. 저녁 8시가 넘었지만, 백야 기간이라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갑판에서 멀어지는 덴마크 땅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 음식

배가 출항하자 다른 승객들은 저녁 뷔페로 가거나 스낵 코너에서 핫도그와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얇은 피자 한 판이 200DKK(약 4만 원) 정도로 비싼 것도 문제였지만, 우리 가족은 피자와 핫도로 저녁 식사를 해결할 정도로 세련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선실로 돌아가 엄마가 캠핑카에서 미리 챙겨 온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비닐봉지에 든 찬밥 덩어리와 김치, 콩잎, 멸치볶음은 1,000km를 달려온 피로를 모두 날려버리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여행 내내 즐거웠지만, 페리의 저녁 식사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행복학 권위자인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한 줄로 요약했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는 것이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는 것이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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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천장에서 침대 두 개를 더 내려서 4인실을 만든 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가족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의 잘못된 시간 계산을 완벽한 여행 계획으로 바꿔준 오늘의 일등 공신 동생과 나는 조촐한 축하 파티를 위해 선실을 슬며시 빠져나와 갑판으로 나갔다.

독일에서 챙겨온 좋은 술과 베트남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먹태깡과 대한민국의 자취생 최고의 사치품인 고추참치를 놓고 우리는 떨어져 사는 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망망대해에 둥실둥실 떠서 북해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랑하는 동생과 홀짝이는 위스키가 바로 서은국 교수가 말한 '행복의 기원'이었다. 자정이 되자 깊은 어둠이 찾아왔고,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리 여행의 이튿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북해 위의 Bar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한 동생과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 북해 위의 Bar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한 동생과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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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는 아침 6시에 노르웨이 스타방에르(Stavanger)에 도착했다. 위도가 많이 높아져서 그런지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북해의 바람은 차가웠다. 나는 추운 겨울을 싫어하지만, 호치민에 살면서 너무나 그립던 '찬 바람'이었다. 투명하게 깨끗한 바닷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로 들어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오토바이 매연이 섞여 있지 않은 이 깨끗한 공기맛을 나는 북유럽 여행에서 가장 좋아했다.

하선을 마친 페리는 다시 북해를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해안선은 절경의 연속이다. 사실 노르웨이 여행은 서쪽 해안의 피오르(Fjord)를 두 눈에 가득 담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르웨이는 트론헤임(Trondheim)을 기준으로 남부 지역에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 마을과 도시가 이 남쪽 피요르를 따라 형성되어 있어서 페리를 타고 조망하는 바닷가 풍경이 참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정겹다. 물론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노르웨이 북부지역을 위해 아껴두었다.

 투명하게 깨끗한 바닷바람이 눈에 보일 듯했다.
 투명하게 깨끗한 바닷바람이 눈에 보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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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 남부 지역 바닷가 마을의 보편적인 모습
 노르웨이 남부 지역 바닷가 마을의 보편적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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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우게순(Haugesund)을 지날 때 초대형 크루즈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12만 톤급 크루즈 선 '아이다 프리마(Aida Prima)'호에 가까이 다가가자 엄청난 위용이 느껴졌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불과 하루 전에 피요르라인 페리에 오르며 이정도면 크루즈라며 환호성을 질렀는데, 크루즈의 발코니에 앉아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관광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있는 우리 배인 줄 알았는데, 크루즈를 보고 나니 우리 배에는 야외 수영장도 없고 비치베드도 없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이런 때에 쓰는 말일 것이다.

아이다 프리마호를 검색하니 일본 미츠비시 중공업이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했단다. 약간 복잡미묘한 애국심이 갑자기 솟았다. 에잇, '크루즈를 안 본 눈 삽니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캠핑카 여행을 마치던 날 부모님과 나는 크루즈 여행 관련 유튜브를 하루 종일 들여다 보았다. 우리 눈은 이미 크루즈를 본 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박 3일 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다

견물생심 크루즈 안 본 눈 삽니다.
▲ 견물생심 크루즈 안 본 눈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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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는 오후 12시 30분에 정확하게 베르겐(Bergen) 항구에 도착했다. 이렇게 큰 배가 정시 운행을 하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너무나 놀라웠다. 우리는 예약해 둔 베르겐 근처의 캠핑장으로 차를 몰았다.

베르겐은 노르웨이 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에 사시사철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특히나 여름 휴가철에는 도로에 일반 승용차보다 캠핑카가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니 노르웨이 남부지역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일정을 고려해 반드시 출발 전에 캠핑장을 예약해야 한다.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캠핑장은 Grimen Camping(주소 Hardangervegen 265, 5226 Nesttun)이었다. 도착하기 1주일 전을 기준으로 베르겐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 중에서 예약이 가능한 유일한 캠핑장이었다. 베르겐 시내도 둘러보고, 베르겐(Bergen)에서 플롬(Flåm)을 배와 기차로 오가는 송네 피오르(Sognefjord) 투어도 해야 했기에 베이스캠프가 될 캠핑장은 반드시 가까워야 했다.

캠핑장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출발한 지 2박 3일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차려 먹는 식사를 했다. 어딜 가나 캠핑의 백미는 숯불을 피워서 연기를 풀풀 풍기며 굽는 두툼한 고기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곁들여 먹는 이 진수성찬 앞에서는 평소 입이 짧아 쌀밥 보기를 돌같이 하시는 고래 양의 수저도 바쁘게 만들었다.

집과 같지 않은 상황인지라 매운 음식을 원하는 정도로 씻어줄 수도 없는데 괜찮다며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입이 짧아 고생인 자녀를 키우시는 분이 있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 캠핑을 떠나보자. 아이가 김치찌개에 수저를 넣는 기적을 볼지도 모른다.

캠핑의 기적 고래 양의 수저가 바쁘게 움직였다.
▲ 캠핑의 기적 고래 양의 수저가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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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부르고 나니 그때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캠핑장은 너무나 고요한 기르메반트네트(Grimevantnet) 호숫가에 있었다.

호수 건너편 작은 산에서는 산등성이를 따라 맑은 물이 흘러 내렸다. 누군가에게 노르웨이는 피오르의 나라이고, 트래킹의 나라지만, 10년 전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노르웨이는 폭포의 나라였다.

노르웨이 어디를 가나 깎아지른 절벽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를 볼 수 있다. 앞으로 이어질 기사에서도 폭포가 주인공인 날들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노르웨이는 절경의 나라니까.

Grimen Camping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가 흥취를 더했다.
▲ Grimen Camping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가 흥취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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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잔잔한 수면 위에 집과 산이 떠 있고, 어둑어둑 해가 지면 바람도 잠들어서 수묵화가 펼쳐졌다. 할 수만 있다면 종이를 펴고 먹을 갈아 오원 장승업처럼 거나하게 취해서 저 풍경을 일필휘지로 화폭에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눈 앞의 풍경은 고작 카메라 따위가 담을 수 있는 서정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11시 59분. 이른 아침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잠들기조차 아까웠던 나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센티멘탈(Sentimental)이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내가 참 좋았다. 참 잘했다.

촬영시간 밤11시59분 백야의 밤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 촬영시간 밤11시59분 백야의 밤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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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https://ninesteps.tistory.com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부릉부릉#캠핑카#북유럽#가족여행#베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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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에서 아이들과 책을 읽고 어른들과 그림을 읽으며 일상을 여행처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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