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공동선언 경기중부본부 상임대표, 경기중부 비정규직센터 상임지도위원, 경기중부민주화계승사업회 운영위원, 경기중부 평화행동 상임대표.'
장재근 전 광수중학교(경기 광주) 교장의 화려한 시민운동 이력이다. 현직만 적은 것이니, 전직까지 합하면 더 다채롭다. 대표 또는 지도위원 같은 묵직한 직함을 가지고 '꼰대 노릇' 하는 게 아니다. 집회, 1인시위 등 그는 젊은 활동가보다 더 열심히 현장을 누빈다.
전직 교장이면 '뒷짐 진 어른'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게 우리 사회 통념이고, 실제 사회 곳곳에서 그런 대접을 한다. 하지만 장재근,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해당하지도 않는 통념이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유였다.
그는 어째서 통일·민주화 운동에 그토록 열심인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13일과 22일 연거푸 경기도 안양시 모처에서 장재근 '615공동선언실천 경기중부본부 상임대표(아래 장 대표)'를 만났다. 이 단체는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맺은 6.15공동선언을 실천해 통일을 이루자는 게 목표인 통일운동연대체다.
예상은 했지만 양복에 넥타이 차림은 아니었다. 그래도 반바지는 아니겠지 했는데, 반바지에 티셔츠. 격식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옷차림에서도 느껴졌다.
'교장 선생님들 은퇴하면 여행 많이 다니던데요?'라고 말을 붙이자 눈치 빠른 그는 "왜 여행 안 가고 1인시위 같은 거 하러 다니냐고?" 하고는 엉뚱하게 1980년 광주 이야기를 꺼냈다.
"80년 5.18때 전투경찰로 광주에 있었는데, 그때 광주 사람들하고 약속한 게 있어요, 스스로 다짐한 것도 있고요."
그가 1980년 당시 광주 사람들과 한 약속은 '죽는 날까지 보고 들은 대로 광주 민주항쟁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다짐한 것은 민주주의와 조국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이것이 그가 여행을 즐기는 유유자적 '은퇴 후 삶'을 버리고 통일·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유다.
"데모 막으러 갔다가 시민군들을 돕게 됐어요. 그동안 청문회 같은 데서 나온 이야기, 그거 다 사실입니다. 사람 죽어 나가는 거 내 눈으로 똑바로 봤어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 놈들(전두환 전 대통령 등)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지."
떨리는 입술, 핏발이 선 듯한 눈
이 말을 할 때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쾌활해 보였던 표정도 180도 변해 눈에 핏발이 선 듯했다. 그는 "광주항쟁에 이은 독재, 친일파 청산 문제, 뉴라이트 논란 등, 이게 다 분단 때문"이라며 민주화 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1980년 당시 장재근은 전투경찰 이경(이등병) 신분으로 광주에 파견돼 전남도청 앞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그때 본 광경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는데, 이 또한 나중에 시민군에 합류하면서 목격한 처참함에 비하면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거리에 있는 젊은 애들은 남녀 구별 없이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도망치며 쫓아가서 두들기고, 그러다가 몸이 퍼지면 팔다리 잡아서 트럭에 던져 버리고. 건물로 도망쳐도 악귀처럼 쫓아가서 두들겨 패는데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어요."
공수부대와 시민군 간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전투 경찰들에게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각자 알아서, 그리고 살아서 부대에 복귀하라'는 명령. 이 명령을 내리는 간부는 이미 사복 차림이었다.
이경 장재근은 전우 한 명과 군복을 입은 채 도망쳤지만, 부대로 복귀할 수 없었다. 광주 지리도 몰랐지만 거리 곳곳에 총을 든 시민군이 있어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어서다. 결국 거리를 배회하다가 시민군에게 몇 번을 붙잡혔는데 그때마다 목에 총구가 겨눠졌다. 당시 광주 분위기가 전투 경찰에게는 너그러운 편이라 화를 입지는 않았지만 목에 총구가 겨눠지던 순간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몸서리칠 정도로 겁나는 기억이라고.
세 번째 목에 총구가 겨눠졌을 때 장재근은 시민군을 따라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나를 따라와"라는 50대 아저씨 말을 듣고는, 저 말을 들으면 살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따라나섰는데, 도착해 보니 적십자병원이었다.
병원에 있던 시민군들은 장재근과 그의 전우를 마치 개선장군처럼 반겼다. 전투 경찰이 자발적으로 시민군과 합세하러 온 줄로 안 것이다. 장재근은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환자를 돌봤다. 사망한 사람을 영안실로 안치하는 일도 도왔다. 그 당시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 참담함과 두려움은 그가 틈틈이 쓴 일기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5월 21일 이곳에 왔다. 언제 죽음이 나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글을 쓴다. 부모, 형제 친지, 은사들에게 도움만 받아 왔지 그들에게 무엇하나 주지 못했다. 이대로 빚만지고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 1980년 5월 22일 일기 요약
"어제 시체 20구를 입관해서 도청 앞으로 옮겼는데, 저녁에 또 죽어 들어왔다. 오늘은 얼나마 죽어 들어올지 모르겠다." - 5월 23일 일기 중
"21일 저녁과 22일에는 당장 죽음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저와 제 동료는 이곳 적십자 병원에 들어와서 여기 근무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면 숨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죽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개나 닭보다도 더 쉽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 저도 죽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지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여기 광주는 전쟁터입니다. 서로 쏘고 죽고 죽이고 아수라장입니다. 만약 제가 잘못되면 이 글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 5월 23일, 어머니에게 쓴 편지 요약
이 편지는 끝내 부치지 못하고 그의 비망록으로 남았다. 5월 25일 쓴 일기에는 "이 땅에 참 평화가 오고 민주주의가 꽃피워 통일이 이루어져 모든 민족이 웃으며 그리고 사랑하며 살도록... 그날이 오면 덩실덩실 춤을 추겠습니다"라는 글도 적혔다. 20대 초반 장재근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1987년, 시위 현장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친구도 데리고...'
장재근은 일주일 뒤인 5월 28일, 병원을 침탈한 계엄군에 잡혔다. 군인 신분을 증명하지 못해 죽도록 맞았지만 구사일생 목숨을 부지하고 우여곡절 끝에 부대로 복귀했다. 착해 보이는 한 계엄군이 부대에 직접 전화해 신분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면 살아서 집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목숨을 건진 장재근은 몇 년 뒤 전역, 학업을 마치고 교사가 돼 경기도 안양공고에서 교사 인생을 시작한다.
광주를 겪기 전 장재근이었다면 교장 말 잘 따르는 평범한 교사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를 겪고 난 장재근은 그럴 수 없었다. 광주 시민군과 한 약속, 또 스스로의 다짐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태동을 한 1990년대 초반 교사 장재근은 전교조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이전 1987년 민주항쟁 때는 안양 지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중항쟁에 직접 참여해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쳤다. 그때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집회 현장에서 우리 학교(안양공고)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 애들이 막 도망가는 거예요. 선생이 데모하러 왔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자기들 잡으러 온 줄 안 거지. 그래서 불러 놓고 '잡으러 온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뒤 시장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사줬지.
한 녀석이, 우리도 선생님 봤다고 안 할 테니, 우리 봤다고 하지 말라고, 하하.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다음번에 나올 때는 친구들 많이 데리고 나오라'고 했더니, 이 애들이 기특하게도 다음에 정말로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나와서, 그때 간식비 많이 들었어요."
안양·군포·의왕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가 2019년 펴낸 <독립, 민주, 인권을 만나는 역사탐방>에 따르면, 87년 6월 항쟁 기간인 19일과 23일 26일 총 세 차례 안양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19일과 23일 시위는 주로 대학생들 참여했다. 26일 시위에는 일반 시민까지 참여해 민정당 지구 당사에 화염병을 던졌고, 안양경찰서 담벼락을 무너뜨렸다. 경찰서 안에 있는 관사와 안양역에 있는 역전 파출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당시 시사월간지 <말> 8월호는 안양 지역 민주화 투쟁을 이렇게 기록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약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 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전교조 하다가 실연까지 당했지만
전교조 활동은 험난했다. 낮엔 수업하고 밤엔 동료 교사들을 만나 '설득' 작업을 했다. 그 당시 용어로는 '포섭 작업'. 이뿐만 아니라 그 당시 잦았던 노동 파업 현장에 가서 꽹과리도 두들겼으니(풍물패 활동) 교장 눈초리가 고울 리 없었다. 아침에 교장실에 불려갈 때마다 장 선생은 "퇴근 후인데 왜 관여하느냐"고 따지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진급 따위는 뒷전으로 미뤄뒀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전교조 활동 덕분에(?) 실연의 아픔도 겪었다. 여교사였다. 그가 "왜 전교조 같은 거 하느냐"고 물어 "내 자식들은 좀 더 좋은 세상에 살게 하고 싶어서"라도 대답했는데, 이게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됐단다. 웃음기 있는 얼굴을 유지한 채 에피소드 인양 이 말을 했지만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다. 젊은 그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리라.
그 뒤 장재근 선생은 전교조 활동을 이해하는 교사를 만나 결혼했고 1991에 전교조 경기지부 안양·군포·의왕·과천지회장을 맡았다. 2000~2001에 다시 전교조 군포·의왕 지회장직을 역임했다. 2012년에 공모 교장으로 광수중학교에 부임해 2019년 정년퇴임을 한다.
'교장을 하면서도 시민군과 한 약속을 지켰느냐?'는 물음에 그는 "지켰다"라고 즉답했다.
"눈치 안 보고 해야 할 일 다 해버렸어요. 직접 수업 들어가서 내가 겪은 광주 민중항쟁 이야기도 들려줬고,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는 학생과 학부모 의견을 모아 추모 행사도 했습니다. 버스를 대절해 학생과 학부모들을 세월호 추모 공간이 있는 안산 화랑유원지로 보내기도 했어요. 그 덕에 '빨갱이 교장, 빨갱이 교장이 학교 망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후회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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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2016년, 교장이 나서서 장소 마련한 '세월호 추모 플래시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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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근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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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 지키려고 지금도'라는 물음에도 역시 "그렇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온 편인데, 그게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살펴 줬고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이 도와줬고...이젠 제가 돌려줘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내 나름의 방식이 통일·민주화 운동인 거죠. 통일과 민주를 위해서 총 들고 앞장서라면 그건 자신 없어요. 그저 이 땅에서 앞으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고, 이게 인생 2막을 '통일과 민주화'로 잡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