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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무렵, 조선이 네덜란드와 도자기로 무역의 길을 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네덜란드 출신의 핸드릭 하멜(?~1692) 일행이 표류해서 조선에서 겪은 이야기를 쓴 <하멜표류기>가 있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구세계에 최초로 알린 표류기로 유명하다.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관리들이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주목하고 조선과 도자기 무역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16세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하여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뒤를 이어 17세기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앞다투어 무역의 길을 찾아 새로운 미지의 나라를 향해 떠났다.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1653년(효종4년) 6월 18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스페르베르' 호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와 일본은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 배에는 1651년 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있던 핸드릭 하멜이 타고 있었다. 하멜 일행은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6일 제주도에 불시착하게 된다.

태풍을 만난 시기가 우리나라에서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시기인 것으로 보아 중간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에 표착한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핸드릭 하멜동상 강진 병영 하멜전시관 앞의 동상으로 17세기 하멜이 우리나라로 표류해옴에 따라 네덜란드가 조선과 도자기 무역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 네덜란드 핸드릭 하멜동상 강진 병영 하멜전시관 앞의 동상으로 17세기 하멜이 우리나라로 표류해옴에 따라 네덜란드가 조선과 도자기 무역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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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탄 네덜란드 무역선인 스페르베르호는 심한 폭풍우에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들은 제주도 관원들에 붙잡혀 제주 감영에 억류되었는데 다음해인 1654년 5월 탈출을 시도하다 붙들려 이 때문에 서울로 압송당하게 된다. 이들이 압송되어 간 루트를 보면 제주에서 출발하여 육지의 해남을 거쳐 나주, 장성,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되어 왔을 때 한양에는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26년전 표류해 와 있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1596~?)가 있었다. 한국 이름이 박연으로 알려진 벨테브레는 대포를 만드는 등 병기 개발에도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여 그와 함께 온 동료 2명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해 조선인 여자와 결혼 두 명의 자녀도 두고 있었다.

당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의 벨테브레 부대에 소속되었으나 그들은 한양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몇 차례 탈출을 시도하고 청나라 사신 행렬에 하멜 일행 중 일부가 뛰어들어 자신들을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운다. 이에 처형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하멜 일행을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 보내게 된다.

강진 병영에서의 유배생활

강진 병영의 8백년된 은행나무 하멜이 유배생활을 했을떄도 있었던 은행나무다.
▲ 강진 병영의 8백년된 은행나무 하멜이 유배생활을 했을떄도 있었던 은행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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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은 강진 전라병영에서 1656년 3월부터 1663년 3월까지 약 7년 가량을 머물러 살게 된다. 강진 병영에 가면 당시 하멜 일행이 살았던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는 하멜 일행이 억류 생활을 했던 전라병영성과 하멜의 영향을 받아 쌓았다는 마을의 돌담길, 하멜이 생활했을 때도 있었다는 8백년된 은행나무 등 당시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이 약 7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강진 전라병영성
▲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이 약 7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강진 전라병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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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멜의 억류생활과 전라병영성을 소개하는 기념전시관에 가면 당시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전시관 옆에는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가 세워져 있고 하멜 동상이 자신의 고향을 가리키는 듯 서 있다.

이곳 하멜 전시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도자기다. 모조품 이기는 하지만 풍차가 그려진 <청화백자 풍차문접시>를 비롯 <청화백자 봉황문>접시 등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도자기를 볼 수 있다.

도자기로 만든 네덜란드 타일 건축소재인 타일이 네덜란등에서 17세기에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 도자기로 만든 네덜란드 타일 건축소재인 타일이 네덜란등에서 17세기에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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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청화백자 형식으로 만들어진 타일 도자기다. 지금 우리가 쓰는 타일 형태와 비슷한 이 타일 도자기에는 범선이 조각되어 있는 것도 있고 당시 네덜란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그림들이 있다. 당시 유럽에서 도자기를 활용한 타일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하멜 일행이 유배 생활을 했던 전라병영성은 전라도의 육군을 총괄하는 총지휘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병마절도사가 있었다. <하멜표류기>에는 병영에서의 생활이 잘 기록되어 있다. 1656년 4월, 하멜일행이 강진 전라병영성에 도착했는데 병마절도사는 하멜 일행에게 한 달에 두 번씩 군청 앞의 광장과 장터의 풀을 뽑고 청소를 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1657년 2월 새 절도사가 부임했는데 새 절도사는 전임 절도사와는 딴판이어서 자주 일을 시켰다. 전임 절도사는 땔감을 지급해 주었으나 신임 절도사는 이 특혜를 없애버려 나무를 구하기 위해 어떨 때는 산을 넘어 20km를 가야 하기도 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는지 구걸과 남아 있는 식량과 필수품으로 추위에 대비하기도 했다.

1658년에는 장티푸스가 퍼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1659년 기록에는 스님들과 사이가 좋았는데 스님들이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다른 나라의 풍습에 대해 말해주면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66년 9월 4일 하멜 일행은 조선인에게서 산 배를 타고 탈출해 여러 날을 항해한 끝에 드디어 일본에 도착한다. 그리고 8일 나가사키 앞 고토섬에 다다랐다가 14일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에 도착한다. 이들은 여수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하여 가게 되는데 하멜 일행이 강진 병영에 온 것은 33명이었으나 8명만 돌아 갈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조선 도자기 무역 검토

강진 병영 하멜전시관 강진 병영에는 하멜의 유배생활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있다.
▲ 강진 병영 하멜전시관 강진 병영에는 하멜의 유배생활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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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일행은 동인도회사 관리들에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보고하게 되는데, 이들은 조선에 일본처럼 상관을 설치해 직접 교역하면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조언하게 된다.

동인도회사는 무엇보다도 도자기에 주목했다. 당시 유럽인은 중국산 도자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전에 중국 자기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지만 직접 동아시아 교역로를 열면서 도자기를 저렴하게 수입하고 있었다.

하멜이 조선을 떠난 지 2년 뒤인 1668년 8월 네덜란드는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와 일본 데지마 상관장에게 조선과 직교역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은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교역 하면 일본은 데지마 상관을 폐지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를 한다. 이로인해 네덜란드가 조선과의 도자기 무역을 포기함에 따라 조선과 네덜란드의 도자기무역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강진은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때는 고려청자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의 무역도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이때 네덜란드와 통상무역이 이루어졌다면 또 다른 역사가 쓰여지지 않았을까?

#하멜#전라병영성#강진유배#도자기무역#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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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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