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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이즈루(舞鶴). 이름으로 봐선 선계(仙界)를 연상케 하는 도시다. 은막 뒤 하얀 학이 긴 목을 길게 빼어내 유려한 몸짓으로 춤을 추며 노니는 마이즈루는 신선이나 놀법한 도시다. 하지만 우리에겐 낯선 타국의 도시다. 그 낯선 도시에 조선의 백두광대가 모였다. 그들은 내로라하는 대한민국의 풍물굿쟁이들이다.

2024년 8월 24일, 그들은 일본 오사카 후 마이즈루시 시모사바카 해변에 현수막 한 장을 내걸었다.

'혼은 혼반에, 넋은 넋반에 담고, 육은 희열 속으로...'

해방된 조국으로 향하다... 수장된 사람들
우키시미미루 폭침 사건 현장 마이즈루만 시모사바카 해변 우키시미미루 폭침 사건 현장 마이즈루만 시모사바카 해변에 걸린 백두광대 진혼굿을 위한 현수막 설치 준비 중
▲ 우키시미미루 폭침 사건 현장 마이즈루만 시모사바카 해변 우키시미미루 폭침 사건 현장 마이즈루만 시모사바카 해변에 걸린 백두광대 진혼굿을 위한 현수막 설치 준비 중
ⓒ 권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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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만큼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5분,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서 부산항으로 향하던 귀국선 우키시마마루가 폭침했다. 우키시마마루엔 조선인 강제 징용자와 노동자 수천 명이 타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으로 향하던 그들이 마이즈루만 시모사바카 해변 500m 전방에 수장됐다.

그러나 79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누가, 왜, 몇 명이 죽어갔는지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사건의 진상 규명이나 배상도 없이 그저 호수처럼 잔잔한 마이즈루만에 묻어버렸다. 그렇게 전설처럼 남아있던 사건을 기억한 사람들은 마이주르만이 삶의 터전이었던 그곳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키시마마루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고, 1978년 폭침 현장이 마주 뵈는 곳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선인 순난의 비'를 세우고, 해마다 8월 24일 추모제를 지냈다. 올해도 어김없이 25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우키시미미루 순난 79주년 추모 집회'를 가졌다.

2024년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모집회 현장 '우키시마마루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은 해마다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모집회을 연다.
▲ 2024년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모집회 현장 '우키시마마루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은 해마다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모집회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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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 폭침 현장이 바라다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 현장 우키시마마루 폭침 현장이 바라다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 현장에서 침몰 현장을 배경으로 추모제 지내는 모습을 촬영
▲ 우키시마마루 폭침 현장이 바라다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 현장 우키시마마루 폭침 현장이 바라다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 현장에서 침몰 현장을 배경으로 추모제 지내는 모습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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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79주년 추모집회에 조선의 백두광대들이 함께 했다. 그들이 준비한 진혼굿은 이진희( 국가무형문화유산 살풀이춤이수자/ 공연예술학 박사/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의 도살풀이춤으로 막을 올렸다.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조선의 춤꾼 이진희가 쪽 찐 머리에 하얀 한복을 입고 긴 수건을 흩뿌리며 영혼을 불러 모은다. 슬픈 살풀이 가락에 몸을 부린 그녀의 춤사위로 나비처럼 영혼이 모여들었다. 살풀이는 인간의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춤이다.

오소서! 오소서! 오소서!
고향 산천 광대들이 귀국선 우키시마마루 폭침으로 희생 당하신 영령께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리 늦어 정말 미안합니다.

도살풀이춤 이진희( 국가무형문화유산 살풀이춤이수자/ 공연예술학 박사/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 도살풀이춤 이진희( 국가무형문화유산 살풀이춤이수자/ 공연예술학 박사/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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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도살풀이춤 이진희( 국가무형문화유산 살풀이춤이수자/ 연예술학 박사/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 이진희 도살풀이춤 이진희( 국가무형문화유산 살풀이춤이수자/ 연예술학 박사/ 아트코어 굿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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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조선의 광대 전동일이 하미굿을 펼쳤다. 하미는 만신이 굿을 할 때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입에 무는 삼각형 모양(△)의 한지다. 하미굿에서는 소원지로 하미를 만들어 무는데, 그 이유는 주위와 나로부터의 부정을 막고, 나의 신과 심성을 일으켜 밝히고, 나와 주위를 정화하고 축원하기 위함이다. 이번 하미굿에서는 우키시마호 영령들의 비통함과 서글픔, 이루지 못한 부푼 꿈과 바람을 하미에 담아 달래주고 일으켜 주기 위해 그가 하미를 물었다.

전동일의 하미굿 전동일/ 예술가/ 전 사회적협동조합 살판 이사장
▲ 전동일의 하미굿 전동일/ 예술가/ 전 사회적협동조합 살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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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은 임인출의 비나리와 부포춤이다. 울컥 광대 임인출은 리허설을 위해 진혼굿 하루 전날인 8월 23일, 현장을 찾았다. 우키시마마루 침몰 현장을 바라보고 두 손을 모았던 그는 비나리 첫 구절을 끝내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 나 못 하겠어요. 안 돼요."

 전동일은 수천명이 수장된 앞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임인출은 현장 리허설에서 비나리 한 소절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들은 그날의 아비규환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동일이 방명록에 남긴 한 줄. "미안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모든 광대의 심경을 한 줄로 토해냈다.
 전동일은 수천명이 수장된 앞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임인출은 현장 리허설에서 비나리 한 소절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들은 그날의 아비규환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동일이 방명록에 남긴 한 줄. "미안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모든 광대의 심경을 한 줄로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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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일은 수천 명이 수장된 앞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임인출은 현장 리허설에서 비나리 한 소절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들은 그날의 아비규환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동일이 방명록에 남긴 한 줄. "미안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모든 광대의 심경을 한 줄로 토해냈다.

꿈에도 그리운 고국산천
처자식도 못 보고 오
고향땅도 못 밟아보고
이 바다를 헤매도
서 산천을 건너도
어허~~ 어허~~
푸른 하늘 눈이 시리게
적막한 먼바다
돛대도 없이 샃대도 없이
어디로 갈꺼나
어허~~ 어허~~
흰구름 따아
달빛을 좇아
우리내 땅 하나 된 조국
내님 찾아간다


임인출 비나리

 ▶임인출/ (사)사물놀이 이광수 민족음악원 수석단원 및 성남지회장/ (사)경기민족굿연합 이사장 /풍류사랑방 일과놀이 대표
 ▶임인출/ (사)사물놀이 이광수 민족음악원 수석단원 및 성남지회장/ (사)경기민족굿연합 이사장 /풍류사랑방 일과놀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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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광대는 진혼을 담은 비나리로 원혼을 위로했다. 어떤 말이 그들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으랴만... 진혼, 어쩌면 그것은 산자를 위한 대속 행위일지도 모를 일이다.

평온한 영혼으로 안식을 하도록... '축원'하는 굿

 죽은 이의 영혼도 산 자의 영혼도 나비가 되었다.
 죽은 이의 영혼도 산 자의 영혼도 나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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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었을까. 광대가 쓴 하얀 부포의 빨간 꽃술이 죽은 아이를 안은 조선 어미의 동상 가슴팍에 꽂혔다. 필자가 조선 어미가 겪어냈을 고통과 처음 마주한 것은 지난 1월 27일이었다. 가슴팍에 꽂힌 분노는 작지만 강렬했다. 조선의 두 어미는 마주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했다.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 약속이 백두광대들과 2박 3일 진혼굿 기행이다.

일본 제국주의 만행 희생자인 그들에게 누군가를 대신해서 미안해 할 자격이 과연 우리 백두광대들에게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 동포가, 나라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우리 국민이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다 폭침으로 수장 당한 사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무심했다는 데 그 미안함의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누군가 사과 주체로서 자격을 운운한다면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김원호(풍물굿 연구가/ 퉁소 연주/ 경기도 풍물굿 著)는 풍물굿은 신의 권능을 빌어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매 삶의 신산고초를 스스로 이겨내려는 인간의 힘을 음악과 춤으로 일으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힘을 키워 사람들이 스스로 '삶터를 밝게 하는 삶의 진혼'이라고 한다.

"보통 진혼굿이라 하면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 위로하기 위해 하는 굿'을 말하는데, 이번에 우리 진혼굿은 죽은 이들의 '원귀(寃鬼)'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평온한 영혼으로서 안식'을 하도록 '축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세상 사람들도 '평안한 영혼으로 살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도 되고요.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속해온 이 추도제도 겉보기엔 잘못된 역사에 대한 속죄로 이른바 양심적인 행사라고 여기지만 실은 죽음과 삶 차원의 의례라고 생각돼요. 그들의 생업 현장인 앞바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죽어가는 처참함을 생생하게 목격했는데 죽음과 삶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백두광대가 추구하는 진혼굿의 가치다.

넷째 마당에 조선의 춤꾼 이진희가 다시 탈춤 큰어미 춤으로 등장하면서 여섯 광대가 한 마당에서 놀았다. 꽹과리 임인출, 장구 전동일, 북 윤여진(충남민예총 이사장 / 논산교육풍물 두드림 대표 / 충남작가회의 회원), 퉁소 김원호, 징 최봉규(백두광대 대표)가 벌인 큰어미 춤은 한국 무형 유산인 고성오광대놀이 큰어미 춤을 각색한 작품으로 산자들은 꿋꿋하게 생을 희열 속에서 이어가자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 나비되어 그들이 풀어낸 진혼굿은 '혼은 혼반에, 넋은 넋반에 담고, 육은 희열 속으로...' 그렇게 죽은 이의 영혼도 산 자의 영혼도 나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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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은 혼반에, 넋은 넋반에 담고, 육은 희열 속으로...'

그렇게 죽은 이의 영혼도 산 자의 영혼도 나비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백두 광대 우키시마마루 폭침 희생자 추모비 마당에서 올린 진혼굿 2박 3일 여정이 마련되기까지 109분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걸출한 예술인들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짧은 필력으로는 한 분 한 분의 정성을 표현하기에 벅차서 백두광대의 진혼굿 위주로 쓰다 보니 준비 과정이나 도움 주신 분들의 덕을 표현하지 못하였습니다. 도와주신 여러분!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우키시마마루폭침#진혼굿#백두광대#마이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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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간 교직 생활을 마치고 2021년 8월 명예롭게 정년 퇴직을 하였습니다. 퇴직 후 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현재는 단체 지자체 소셜미디어 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교육, 역사,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한 세상에서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이 건강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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