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
조선 왕조에서 가장 못난 통치자는 누구?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질투심과 당파성에 사로잡혀 개혁의 싹을 자르는가 하면 외침을 초래하고 끝내 조선 왕조를 몰락으로 몰고간 통치자는
누구였을까? 선조, 인조, 그리고 순조 때 섭정을 한 정순왕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에 온 유배객이 귀양살이 한 곳들을 찾아 나서고 한편으로 역사를 탐구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흔히 연산군과 광해군을 최악의 폭군으로 떠올리는데 그들은 폭정을 저질렀을 뿐 어리석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비극적 최후를 안 뒤 피의 보복을 자행하지만 말년에 쓴 시를 보면 그가 성군이 될 자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용렬한 자질로 왕위에 있은 지 십년인데, 너그러운 정사 못 펴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네'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에서 잘못한 줄도 모르는 지도자와는 다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이 있기 며칠 전 뭘 예감한 걸까? 눈물을 흘리려 이런 시를 읊었다.
'인생은 풀섶의 이슬 같아서 서로 만날 때가 많지 않네'
연산군은 교동도로 귀양 간 뒤 처자식마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왕족은 원래 강화도나 교동도로 유배 보내는 게 관례인데, 광해군은 교동도를 거쳐 제주도로 이배(移配)된다. 유배형은 몇 등급으로 나뉘는데, 제주도는 '절도안치'의 가혹한 유배지였다. 흑산도·추자도와 함께 '원악도'(遠惡島)의 대명사로 불렸으니 그만큼 서울에서 멀고 살기 힘든 섬이었다.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의 5형 가운데 징역보다 유배가 더 엄한 형벌이라는 점을 현대인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원악도' 유배는 살아남기 쉽지 않은 형벌이었다.
유배형 중에서도 '본향안치'는 고향에 내려 보내는 거라서 가장 가볍고, '중도부처'는 먼 곳으로 유배지를 정해놓고 중도에서 머물게 하는 형이다. '주군안치'는 유배지 행정구역 안에서는 나다닐 수 있게 하는 형이고, '위리안치'는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둘러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형이다.
선조와 인조가 광해군을 그토록 미워한 이유
광해군은 '절도안치'에 '위리안치'가 가중됐으니 인조반정에 성공한 자들이 광해군에게 품었던 재위 시의 미움과 복위할 경우의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제주도로 이배된 것도 정묘·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의 지원으로 복위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근래에 '이중외교'라는 연구도 나왔지만, '중립외교'를
하며 약소국이 중원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는 참화를 피해왔다.
<연려실기술>은 제주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이 감시 군인과 여종들한테도 수모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귀양살이한 집, 곧 적거지(謫居址)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의 <남환박물> 두 필사본에는 단서가 나온다. 영천이씨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문중본에는 '제주 서쪽 성안에 있다'고 돼있고,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최근 완역한 박물관본에는 좀 더 자세하게 제주목관아 안에 있는 2층 누각인 '망경루 서쪽 성안에 있다'고 써놓았다.
광해군 적소 터를 알리는 비석은 지금 제주시 중앙로 제민신협 본점(이도1동 1474-1) 자리에 있는데 <남환박물>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곳은 망경루 서쪽이 아니라 동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1996년 <한라일보>가 제주시와 협약해 88곳 유적지에 표석 세우기 행사를 할 때 표석건립자문위원들은 광해군 적거지가 명확치 않다는 이유로 심의를 보류했지만 기록이 나타나면 제 위치에 건립한다며 서둘러 표석을 세웠다.
바로잡아야 할 광해군 적소 터
<남환박물>은 광해군이 유배지에서 죽은 뒤 63년밖에 안 된 때 쓴 책이고, 화공을 데리고 다니며 그림까지 그려 <탐라순력도>를 남긴 이형상 목사의 실증적 저술 태도로 보아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하겠다.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제주목관아 서쪽 담장 너머로 추정한다.
강 소장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또 다른 근거는 광해군이 교동도에서 제주도로 이배될 때 남긴 시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당시 배에도 장막을 칠 만큼 비밀에 부쳤기에 광해군은 제주에 도착한 뒤 그제서야 호송 별장의 말을 통해 '원악도'에 도착했음을 알았으니 그 심경이 어땠을까?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여기서 '백 척 누각'은 망경루(望京樓)로 보인다. 조선시대 20개 목(牧) 가운데 제주목에만 2층 누각이 있었는데, 제주목사는 제주도 전체 군사령관인 절제사를 겸했기에 유일한 당상관이었다.
광해군은 유폐생활 19년, 제주에 온 지 4년 만인 1641년 음력 7월 1일 숨지는데, 그날은 제주에 '광해우'(光海雨)라 해서 광해군의 억울한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속설이 있다. 제주도 민요에도 가뭄에 광해군이 비를 내린다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제주 민심은 그를 동정했던 듯하다.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돌아가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가물다가도 비가 오는구나)'
세자 일가를 몰살하다시피 한 인조
인조는 소현세자가 워낙 출중해 자기 자리를 노릴까 의심한 나머지 아들 일가를 죽음으로 몰고간 옹졸한 인물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명분 등으로 반정을 일으켰기에 정묘·병자호란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소현세자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처럼, 정묘호란 때 분조(分朝)를 잘 이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는 의주로, 인조는 강화도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뒤 '임시정부'를 이끌고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한 아들이 못난 군주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영민했던 그는 청나라의 고관이나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교유하는가 하면 아내 강빈의 권유로 심양관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돈을 주고 구출해 일하게 하는 등 외교에 능숙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들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생각한 인조는 그가 일시 귀국했을 때 냉대했고 심양에서 병을 얻은 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죽어 '독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남인 집안 출신인 강빈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고,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 곧 자신의 손주, 석철·석린·석견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사관은 이런 인조의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남겼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만약 하루 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의 영혼이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세 살배기 최연소 유배객 "뱀이 제일 무섭다"
열 살이던 석철은 과연 이듬해 9월 병에 걸려 죽고, 둘째 석린도 석 달 뒤 형의 뒤를 따라간다. 세 살배기로 귀양 온 막내 석견은 최연소 제주도 유배자였는데 그의 눈에
비친 제주 생활은 어땠을까? 그가 남긴 글 중에는 '제일 겁나는 게 뱀'이라고 쓴 구절이 있다. 그는 나중에 귀양에서 풀려나 경안군으로 복권되고 두 아들을 두었지만 몸도 마음도 상했는지 스물두 살에 죽는다.
그러나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 형제도, 소현세자 대신 왕이 된 봉림대군, 곧 작은할아버지 효종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된다. 강화도에서 '임창군이 왕실 종통이며 보위에 올려야 한다'는 의문의 '흉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임창군의 아들 밀풍군은 이인좌의 난 때 자기 뜻과 무관하게 왕으로 추대됐는데, 영조가 자진할 것을 명령해 목숨을 잃는다. 4대에 걸쳐 비극이 이어진 것이다. 정통성이 있는 이가 왕위 계승에서 한번 밀려나면 그 가계가 정통성이 부족한 왕들에게 어떤 박해를 당하는지 이보다 더 잘 말해주는 궁중 비극이 있을까?
개혁도 종교자유도 철저히 억누른 정순왕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약용 등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고 천주교에도 관대했다. 그러나 정조가 석연치 않게 병세가 악화해 급서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된다.
조선 최초 신자이던 이승훈과 황사영 등 천주교도들이 꿈꾼 세상은 신분과 남녀
차별이 없는 사회였지만 노론 기득권 세력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사학'(邪學)이었다. 개혁 사상가였던 정약용마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는 몰라도, 국문장에서 자신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했다면서 황사영과 이승훈을 고변한다.
"황사영은 제 조카사위이지만 원수입니다. 그자는 죽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백다록'은 이승훈입니다.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걸 즐거워했습니다."
정약용은 이승훈의 처남이었는데 다른 처남인 정약종은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을 살리려고 그들이 배교했다는 문서를 의금부에 바친 뒤 순교한다. 정약용은 이가환 등과 더불어 노론 기득권 세력이 꼭 제거하고 싶은 정적이었다. 노론 벽파 홍낙안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사상가 정약용에게 느낀 이율배반의 연민
천주교를 빌미로 정약용을 죽이려 했지만 연루가 약해 성사시키지 못하고 정약종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이는 데 그친다. 정약종을 굳이 죽인 것은 한 집안에서 대역죄인이 나오면 자손들까지 벼슬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폐족'이 된 셈이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를 저술 기회로 삼아 조선시대 최다 역작들을 남겼다. 나는 실직 상태에 있던 2000년 다산초당을 찾아가서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과 불법 증여 문제 등을 줄기차게 비판하다가 <한겨레> 경영진도 부담스러워하자 사표를 던진 것이다. 정약용이나 역사학자들이 쓴 책들을 읽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졌는데, 나중에 그가 이승훈과 황사영을 고변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을 배론성지로 데려간 이유
제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직할 때 황사영이 토굴에 숨어살면서 '백서'를
쓴 배론성지에 신입생들을 데려 간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글쓰기의 치열함이 어떤 건지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도 무려 1만3311자를 아주 가는 붓으로 기록했다.
관료들이 시골 은둔지까지 천주교도들을 악착같이 찾아내 목숨을 빼앗은 '악의 평범성'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 고문을 받은 민주화 투사 김근태씨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토록 가혹하게 고문하던 이근안이 아내와 통화하면서 "애 감기약 먹였나"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절망했다는 것이다.
제주도·
추자도로 격리된 황사영의 부인과 아들
이번 여름 제주도로 휴가 온 가족들과 함께 다녀온 곳이 추자도인데,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를 찾아 나선 길이기도 했다. 추자도는 제주도, 그리고 정약전이 유배돼
<자산어보>를 쓴 흑산도와 함께 '원악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그의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읍 관비,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관노로 유배된다.
항간에는 정명련이 아들의 종살이를 피하려는 의도로 제주도에 데려가지 않고 추자도에 잠깐 정박했을 때 바위 위에 황경한을 내려 놓았고 어부인 오씨 부부가 발견해 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비극성이 더 가미된 듯하다. 1801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에는 황경한의 목적지가 원래 추자도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역부도 죄인 황사영의 어미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의 관비로 삼고, 처 정명련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삼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인 까닭에 법에 의해 교형을 면제하여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관노로 삼는다.'
두 살배기 아들을 이별하는 애처로움이야 오죽했으랴만, 그들은 살아생전 상봉하지 못하고 두 '원악도'에서 늙어 죽는다. 황경한 묘역 인근 예초리 포구에서 만난 한 노인은 황경한의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제주에서는 정명련을 정난주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천주교 김병준 신부가 제주에서 구전된 이야기를 1977년 글로 쓰면서 처음 등장했다. 성모 마리아의 행적과 비슷하다 해서 천주교에서는 '정난주 마리아'라고 부른다.
황사영 백서에 관해서는 외세를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됐으나, 역사학자 박노자는 '황사영이 지키려 한 것은 보편적 정의'라고 평가했다.
개혁세력 축출과 인권탄압의 귀결
균형 외교로 전쟁을 막아보려 한 광해군과 개혁군주가 될 뻔한 소현세자의 축출, 그리고 천주교를 통해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한편으로 토지제도 개혁을 주창한 남인 실학자들의 무자비한 숙청은 무엇으로 귀결되었나? 결국 조선을 노론 기득권 세력의 폐쇄 사회 안에 가둬버려 외세에 의한 주권 침탈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념이나 종교를 빙자해 정적과 인권을 탄압하고 자리나 이권을 탐하는 세태는 예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 사화는 사대부들 간의 문제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혁은커녕 부자에게 유리한 토지세제로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등 민생을 파탄 내고 외교관계를 그르쳐 전쟁 위험을 높이는 행위는 수천만 민중의 생존권을 직접 위협한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