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성신여대에서 판화를 공부한 김희자 작가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낯선 타국에서 예술이라는 광활한 세계를 홀로 거닐던 작가는 어느 순간 고독과 우울의 늪에 빠졌다.
그런 작가를 구원한 것이 롱아일랜드의 숲이었단다. 김 작가는 롱아일랜드 와일드우드 파크의 녹음 짙은 숲에서 명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울창한 나무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영감을 얻은 그는 나무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희자 작가는 공(空), 허(虛), 무(無)를 주제로 나뭇결에 '영혼의 서사시'를 새겨넣었다. 나뭇결을 따라 흐르는 붓 터치는 섬세하고 서정적이지만 강렬한 에너지로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작가가 직접 고안한 삼각형 입체 구조는 다양한 각도로 설치된 거울과 더해져 몽환적인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깊은 성찰과 관조의 시간을 선사하는 김희자 작가의 < Contemplation ('묵상') > 전시는 서울 청담동에 있는 메타 갤러리 라루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무의 치유 효과에 매료됐습니다"
- 나무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시네요. 나뭇결을 따라 붓 터치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느낌이 들어요. 나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어요. 우울증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숲에서 치유 효과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거주했던 롱아일랜드에 와일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산책도 하고 명상도 했어요. 티베트 승려들의 명상 방법 중 '통렌'이라는 게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 좋은 기운을 내뿜는 거죠.
티베트 승려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 옆에서 통렌 명상을 합니다. 그러면 아픈 사람들이 치유돼요. 나무도 그런 것 같아요. 숲에서 거닐고 호흡을 하다 보니 저도 치유가 됐습니다. 나무의 치유 효과에 매료돼 나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 나뭇결이 작품의 느낌을 크게 좌우하는 만큼 나무를 고르는 기준이 있으실 것 같아요.
"물론입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에 따라 선택하는 나무도 달라집니다. 원하는 느낌에 따라 단풍나무나 체리 나무 같은 외국 나무를 쓰기도 하고, 한국 나무를 쓰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소나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나무의 거친 움직임과 그 너머의 산맥을 표현한 <무상을 관조하다>는 한국 소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나뭇결은 나무가 쓴 일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나뭇결 속에 나무가 저한테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나무가 지나온 수많은 계절과 바람의 흔적이 나뭇결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고요. 제가 사용하는 나무에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나무를 자른다고 하면 대개 나이테 방향으로, 횡단으로 자르는 걸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종단으로 자른 나무판에 그림을 그립니다."
- <장자의 꿈>, <가슴 가득히 품은 꿈> 등 삼각형 입체 모양을 띤 여러 작품을 선보이셨어요. 다른 전시에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삼각형 작품도 공개하셨고요. 삼각형은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삼각형 작업은 나름대로 굉장히 어렵게 시작한 겁니다. 입체 형태로 삼각형을 만들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실패율도 높고요. 저는 3이 가장 완벽한 균형을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기하학에서 3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우주에서는 3이 곧 탄생을 나타내죠. 우리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숫자 3은 곧 '천-지-인'의 조화를 상징하거든요."
- 삼각형 입체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 거울이 설치돼 있어요. 거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경을 좋아해서 종종 만들곤 했습니다. 집 근처에 거울집이 하나 있었는데요, 거울을 자르고 나면 남는 부분이 있잖아요. 제가 하도 자주 가니까 아저씨가 남는 부분을 모아뒀다가 주셨어요. 그러면, 그걸 받아와서 직접 만화경을 만들어 보곤 했어요. 그때부터 거울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거울은 단순히 상을 비추는 물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은유하죠. 마음을 닦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닦는다는 말이 결국 메타포(은유)인 거죠. 사각 박스 형태로 되어 있는 작품에도 거울이 들어가 있고, 병풍 형태로 된 작품에도 거울이 들어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는 분들이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작품 속에 들어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품과 관람객이 하나가 되는 거죠."
-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색감 때문인지 6월에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폭풍의 퀘렌시아>가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갤러리에 걸린 모습을 보니 한층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관람객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없었는데요. 전시회를 방문하신 20~30대 관람객, 그중에서도 남성 관람객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많이 보입니다. 붉게 칠해진 부분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고 하더라고요.
퀘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합니다. 투우사와 혈전을 벌이다 지친 소가 잠시 쉬어가며 회복하는 곳이 바로 퀘렌시아입니다. 창에 찔린 소는 퀘렌시아에서 거친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안식처가 필요하죠. 관람객분들도 이 그림을 보며 폭풍을 넘어서서 쉬어가는 느낌을 맛보기 바랍니다."
- <누적된 시간속으로>라는 작품도 궁금합니다. 나뭇결이 사막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느낌도 들고요. 여러 개의 나무판이 비스듬하게 세워진 형태도 특이합니다.
"이 작품에는 나무의 이야기가 잘 담겨 있습니다. 나무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을 살면서 문양을 만들고, 결도 만듭니다. 사막의 모래가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가듯 나무가 견뎌온 긴 세월이 작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병풍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5개의 나무판에 그림을 그려서 비스듬히 설치하고 안쪽에 거울을 넣었습니다. 동양화의 철학을 따른 겁니다. 동양화를 보면 여백의 공간에 시가 들어가 있잖아요. 동양화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림과 시, 제목을 함께 두루 봐야 합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간이 더 확장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그림을 보는 분들이 그 공간을 여유롭게 느끼면 좋겠습니다."
- 작가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에너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제 작품에서는 나뭇결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나뭇결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지구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 작품을 보시는 분들도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에너지를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희자 작가의 <Contemplation> 전시는 오는 11월 9일까지 청담동
메타갤러리 라루나와 가상 전시관( metagallerylaluna.com )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Asian American Art Review 에도 실립니다.미국 예술 잡지 Asian American Art Review와 기자의 개인 SNS에 게재될 예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