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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 전남대학교

2000년 봄, 새내기로서 전남대학교 교정을 밟았다. 당시 인문대는 전반적으로 낡은 학교 건물 중에서도 눈에 띄게 낡아서 내일모레 갑자기 무너진대도 놀랄 사람이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정문에서 인문대 가는 길에는 거대한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봄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각종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등록금 인상 반대와 FTA 협정을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다수였다. 기계 출력한 현수막은 찾을 수 없었고 대체로 손으로 쓴 듯, 힘과 개성이 보이는 필치와 조악하고 삐뚤거리는 필치가 혼재되어 있었다.

경영대에서 인문대 사이 언덕길 뒤편에 그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하얀 건물에는 오른쪽 면에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사범대 1호관에 그려진 '광주민중항쟁도'였다. 5‧18을 형상화한 첫 벽화라고 하는데, 그때 신입생이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고, 2000년, 밀레니엄이 불리는 새로운 세기가 왔음에도 이곳이, 이 학교가 끝내 지켜가고 있는 어떤 것 혹은 별수 없이 유지되고 있는 그 무언가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학과 선배는 좋아하는 시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황하여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백석이나 김수영을 이야기하면 누구 하나 갸웃거릴 사람 없었을 텐데, 얼결에 김남조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시인에 대한 각각의 평가와는 별개로 실상 나는 '설일'이라는 시를 꽤 좋아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하려는 자에게 퍽 어울리는 시이지 않은가.

선배는 그 이름을 당연히 김남주라고 들은 모양이었다. 아아, 김남주 시인! 감탄을 연발하더니, 나를 될성부른 떡잎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닌가.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그런 시인이 있었지, 이름을 들은 것도 같아……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학생증을 받고 도서관에서 처음 빌린 책이 김남주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다.

어느 술자리에서 저는 사실 그 시인을 잘 모른다고, 어쩌면 시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뒤늦은 고백을 했는데, 선배는 이미 취해버렸는지 붉은 얼굴로 딴청이었다. 나도 따라서 밤새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딱히 그럴 일도 없었건만 우리는 모종의 부끄러움에 쫓기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적이라서 누구도 적이 아닌 세상

2000년이면 대학생 모두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기 시작할 때다. 인터넷이 이제 막 보급되었고 골목마다 피시방이 생겨났다. 정권은 교체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교체되었다는 그 정권조차 신자유주의의 파도에 적극적으로 몸을 실었다. 그해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선배들은 학원 강사를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였다. 손으로 쓴 현수막이 그득한 대학 캠퍼스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싸우긴 싸워야 하겠는데, 누구와 싸워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는 것처럼 보였다.

2학년이 되는 겨울,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NL 계열 후보가 특정 종교를 기반으로 출마한 후보를 상대해 가까스로 이겼다. 멋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 선거 운동을 하러 다녔다. 틈틈이 <나의 칼, 나의 피>와 <조국은 하나다>를 읽었다.

여름방학에 머리를 노랗게 탈색했고(당시 영화 <동감>에서 유지태가 하여 유행한 스타일이었다), 우연히 내 머리를 본 인문대 학생회장은 미제 똥물을 뒤집어쓴 게냐, 반농담조로 훈계했다. 그는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김남주가 다녔던 학과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그뿐 아니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입대했다. 입대 전 마지막으로 도서관에 반납한 책은 <사상의 거처>였다.

병장이 되어 내무반에 김남주 시집을 반입하려다 실패했다. 중대장에게 불려 가 지청구를 들었다. 이번만은 조용히 넘어갈 테니 이 책은 버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군인답게 명령을 따라 <은박지에 새긴 사랑>과 <사랑의 무기>를 버렸다(이 정도 제목이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군을 너무 무시했다).

기형도와 고정희의 시집은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해 이라크 파병 장병 모집 공고가 났다. 나라가 허락한 시집을 읽으며, 되지도 않은 시를 쓰며 은박지에 시를 썼다는 김남주를 떠올려 보기도 하였으나 당치 않은 연상 작용이었다.

제대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그때 그날 함께 있던 선배들은 학원 강사 일을 하거나 공무원 시험에 도전 중이었고, 다 쓰러져 가던 인문대 건물은 그사이 수리를 마쳐 번듯해졌다.

학내에 현수막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계속 김남주의 시를 읽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시인이 되려면은 더욱 그러할 것만 같았다. 이제 와 착각이었고 오만이었다고 말한다면 위선일 것이다. 모두가 적이라서 누구도 적이 아닌 세상이 되었고, 그런 세상에 시인은 전사이기 어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것인가

졸업 학기에 등단이란 걸 하게 되었다. 시는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매력적이고 동시에 도통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껏 유약해도 되는 세계에서 유영했다. 그사이 몇 번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용산참사가 일어났고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시는 슬펐고 울었고 침잠했고 때로 분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사의 무기는 아니었다. 시인은 전사가 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전사가 필요했던 시절만큼 사악하고, 시인이 중요했던 시대만큼 무능한 정권 아래다.

김남주 시인 그리고 전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현실에 투쟁했던 만큼 미래를 전망하기 주저하지 않았던 시인은, 눈 감기 전 우리의 미래를 어떤 모양으로 그렸을까. 적어도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마음껏 허둥대고 양껏 갈팡대느라 이리된 것 같기만 해 서럽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당신은, 나는.

 광주 중외공원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시비와 흉상
광주 중외공원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시비와 흉상 ⓒ 광주광역시

김남주의 시는 전남대학교와 가까운 중외공원에 시비로 한 편 남았다. 중외공원은 한때 광주의 10대 청소년들이 댄스 연습장이었다. 아이들은 중외공원 다리 밑 널찍한 그늘에서 브레이크댄스나 아이돌 댄스를 연마했었다(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그곳에 그의 시 중 '노래'가 시비로 남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전문, 김남주

고백하건대 지금까지 이야기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소리를 선명하게 듣지 못해서, 선명하게 듣고 싶어서 늘어놓은 하소연이자 볼멘소리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우리에게 "녹두꽃이나 파랑새, 들불이나 죽창이 되어라" 한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것도 아니다.

이 비겁을 알고 있어 부끄럽다. 부끄러움의 정체를 오래 숨기고 싶었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등허리를 곧게 펼까 두렵다. 괜히 허리를 곧추세운다. 멀리에 무언가 보이는 것 같다. 뭐라 손짓하는 것 같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씩 웃으며…….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효인 시인입니다.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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