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유'라는 용어가 오·남용되고 유체이탈의 증후까지 나타나지만, 이 용어만큼 소중한 가치도 다시 찾기 쉽지 않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 평등·박애와 함께 제시된 이래 인류의 지고한 가치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고대사회 이래 자유인들이 존재하였다. 아웃사이더, 에뜨랑제, 이단아 등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반체제·반규범의 혁명사상가부터 관습과 습속에 매몰되지 않고 사는 인물들이 자유혼이다. 우리의 경우 김시습·김삿갓·허균 등이 대표적이다.
가람은 자유인이었다. 비록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이지만 분방하게 살고자 하였다. 군림하는 권위나 엄숙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술을 좋아하되 정도가 넘쳐 주망을 부리는 일이 없고, 아무리 취해도 꼭 써야 할 원고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 술 다 잡수시고 원고는 언제 쓰십니까?"
하도 신기해서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밤중에 일어나 냉수로 시원하게 관장을 하고 나면 심기가 쇄락해지지, 그러면 일기도 쓰고 원고도 쓰지."
이 '냉수 관장론'은 제자들 사이에 꽤 화제가 되었으나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면 식사를 안 드는 일이 흔했으나 술탈이 났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가람은 일단 술상 앞에 앉으면 특유의 너털웃음과 함께 해박한 지식과 해학으로 좌중을 웃기고 자리를 흥겹게 했다.
강의시간 중의 해학에는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해서기문(海西奇聞)>같은 우리 고전을 소재로 삼는 일이 많았으나, 술자리에서는 우리 전래 민요나 그가 발굴한 '가루지기 타령' 같이 좀 걸쭉한 이야기거리가 자주 인용되었고, 그밖에 항담·잡설 같은 데서도 웃음을 유발했다.
"세상에는 삼액(三厄)이 있네. 중국 여인의 족액(足厄), 서양 여자의 요액(腰厄), 한국 남자의 두액(頭厄)이 그것인데, 그래도 한국은 머리에 있으니 으뜸 아닌가."
하고 가가대소를 한다. 이때 '액'이란 죄어 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주석 1)
술을 좋아하면서 절도를 알아서 마시고 해야 할 일을 방기하지 않았다. 그의 강의는 항상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학과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강의에 한창 흥이 나시면, 맨 앞좌석에 앉은 학생의 얼굴에까지 침이 튀는 것도 아랑곳없이 마구잡이 육담(肉談)식의 말씀이었고, 당신의 이야기에 당신이 취하여 웃으시기도 잘 했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연적(硯滴) 같은 저 젖 보소
담배씨만치 보고 가소
많이 보면 병 납니더.
동래 지방의 이 민요를 음조(音調)까지 붙여 실룩실룩하는 독특한 입모습으로 읊으시며, 수사(修辭)의 묘미와 내용의 소박 진솔함을 되풀이 말씀하셨다. '모시야 적삼'의 '야'와 '병 납디더'의 '더'에 이 노래가 지닌 수사의 묘미가 있고, "도리동실한 연적과 같은 젖통이는 옷섶이 팔랑할 때 참으로 담배씨만치 쪼끔만 봐야지 많이 보면 상사병 나지. 거짓없는 내용이야"하시면서 한바탕 웃음이었다. (주석 2)
시조 <발(簾)>에 자신의 모습이 담긴다
발
종이 한 장으로 우주를 가려도 보고
발을 내리고 그 밖을 내다도 본다
때로의 다름은 있더라도 나는 나로 살련다
철의 장막도 아니고 죽의 장막도 아니다
세계를 누르려는 적이 야심도 없다
나는 나 이러하면서 자유롭게 살련다
나는 한 국민으로 태양계의 위성이라
우주에 태양은 다만 하나이지만
인간의 태양은 너무 많고도 많다. (주석 3)
주석
1> 장순하, 앞의 책, 26~27쪽.
2> 최승범, 앞의 책, 79쪽.
3> <가람시조선>, 8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