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한 학자는 이승을 떠나지만 글을 남긴다. 유업은 학덕을 입은 제자들의 몫이다. 가람이 가신 5년 후인 1973년 제자 시인 최승범이 <가람시조선>을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1939년에 문장사에서 나온 <가람시조집>이 오래 전에 절판인 데다 그 후에 쓴 시조를 찾아서 펴낸 것이다.
목차를 보면 1. '계곡의 장'에는 계곡 등 16수. 2. '난초의 장'에는 난초(1) 등 28수. 3. '시름의 장'에는 젖 등 27수. 4. '생활의 장'에는 괴석 등 48수. 5. '추도의 장'에는 주시경선생의 무덤 등 20수가 실렸다.
책의 말미에 엮은이 최승범은 <가람과 시조>에서 스승의 생애를 일별하면서 '시조론'의 정립에 노력한 스승을 평가한다.
가람 이병기(1891~1968)에 대해서는 그가 이룩한 공적을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폭넓은 국학자요 예술가였다. 국문학도 사적(史的)이고 개론적으로 과학화한 학자요. 시가(詩歌)와 양화(養花)와 주도(酒道)에도 높은 예술의 경지를 오도(悟道)한 예술가였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만한 분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가람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앞으로도 길이 두고 이루어져 나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주석 1)
실로 가람의 한 생(生)이란 우리 민족의 6.7백 년 언어생활의 결정인 시조문학의 부흥과 참신한 창작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주석 2)
시조문학사상 가람은 "전통에서 출발하여 그와 결별하고 다시 시류에 초월한 시조중흥 영예로운 위치"에 서게된 것이라는 <가람시조집>의 발로 다시금 결론지어야 하겠다. (주석 3)
이 책에 실린 다섯 장에서 각 1수씩을 골라 소개한다.
박연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길에 우는 폭포 백이오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 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던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이 흐르는 물이 긋지 아니하도다. (주석 4)
백송(白松)
저 건너 벌전 담 머리 서 있는 백송나무
홀로 우뚝하여 파란 잎 하얀 껍질
오백년 풍우를 겪고도 변할 줄을 모르나다
높은 가지마다 백학이 깃들이고
밋밋한 몸뚱어리 서릿발 어리우고
칠팔월 뜨거운 볕에 찬 바람이 일어라. (주석 5)
그리운 그날(1)
병아리 어미 찾아 마당 가에 뱅뱅 돌고
사령 위 어린 누에 한 잠을 자고 놀 때
누나는 나를 데리고 뽕을 따러 나가오
누나는 뽕을 따고 집으로 돌아가도
금 모래 은 모래 쥐었다 놓았다 하고
나 혼자 밭머리 앉아 해 지는 줄 모르오
소나기 삼형제가 차례로 지나가고
언덕 및 옹달샘에 무지개 다리 놓으면
선여들 머리 감으러 내려 옴을 바라오. (주석 6)
호암(湖巖)의 무덤
재 너머 잔디 비알 앞에는 강이었다
님의 벼린 몸은 흙이 되었을 망정
메와 못 고운 이 곳이 넋이라도 반기시리
보다 기쁜 날이 행여나 올까 하여
타던 그 속을 참고 참다 가신 님을
찾아도 드릴 말 없어 꽃을 심어 드렸다. (주석 7)
주석
1> <가람시조집>, 162쪽.
2> 앞의 책, 167쪽.
3> 앞의 책, 172쪽.
4> 앞의 책, 14쪽.
5> 앞의 책, 41쪽.
6> 앞의 책, 58쪽.
7> 앞의 책, 15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