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오독되는 단어다. 역사 수업 도중 좌파와 우파의 개념을 묻는 데엔 프랑스 혁명 당시를 소개하며 유래라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보수라는 단어만큼은 답변하기가 여간 녹록지 않다. 그냥 보수는 우파를 가리키는 말이라며 눙치고 넘어가기 일쑤다.
"지금 여당이 보수고, 야당이 진보인 거죠?"
아이들 다수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규정이지만, 교사로서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당시의 집권 세력을 무턱대고 보수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단어에 내포된 고유의 가치가 희화화할 우려가 커서다. 이는 보수의 대척점에 있는 진보라는 단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보수가 뭔지 질문이 나올 때마다 칠판에 한자를 적곤 한다. 지킬 보(保)에 지킬 수(守). 물론, 두 한자 중 한 글자라도 아는 아이가 드물다. 요즘 아이들에게 한자는 차라리 '그림'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자를 쓰는 이유는 '지킨다'는 의미가 중첩된 단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킨다'는 타동사다.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가 필요한 동사라는 뜻이다. 보수를 자임한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부러 한자를 끌어온 거다. 이따금 '보수당'에 해당하는 'Conservative Party'라는 영어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경험상 한자에 견줘 임팩트가 떨어진다.
"당연히 권력을 지킨다는 뜻이겠죠."
"그럼 진보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도 권력을 유지하려 할 테니 보수로 규정될 수 있을까?"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 구조, 질서 등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어디선가 읽었어요."
"그렇다면 기존의 전통적 가치와 사회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조선시대? 아니면 대한민국? 그도 아니면 민주화 이후?"
"보수는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진보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대안적인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없었을까?"
아이들의 질문을 몽니 부리듯 반박하고 나면, 며칠 뒤 꼬리에 꼬리를 문 또 다른 질문을 가져와 자연스럽게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구체적으로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친구들끼리 대화 소재로 삼는 경우도 거의 없어 토론이 겉돌 수밖에 없다. 그들의 머릿속 지식은 대부분 인터넷 포털이나 유튜브를 통해 얻은 '믿거나 말거나' 식 정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동서고금에 두루 적용되는 보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시대와 국가, 정치, 경제적 입장에 따라 보수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다를지언정, 우리가 간과해서 그렇지, 시공간을 넘어 관통하는 보수의 가치가 있다. 바로 '공동체를 위한 멸사봉공의 헌신'이 그것이다.
'보수'의 진짜 의미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봉건사회에서도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보듬고 국난 때엔 기꺼이 맨 앞에서 불의에 맞서는 이들이 보수라는 이름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외침에 맞서 의연하게 무기를 들었던 양반 유생 의병장들이 대표적 예다. 그들을 향해 서세동점의 시기 국제 정세의 변화에 어두웠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다.
비록 동학농민군을 신분 질서를 어지럽혔다며 '비도'로 매도했지만, 국권이 피탈되자 자결로써 항거한 황현이야말로 보수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을사늑약에 맞서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은 또 어떤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낸 경화세족 이회영의 여섯 형제가 가산을 모두 정리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실 또한 보수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한다.
단언컨대, 그들을 뭉뚱그려 '위정척사'라는 이름으로 범주화해 이해하는 건 현재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역량을 키운다는 역사교육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본다. 보수의 보편적 가치를 떠올릴 때, 우리 역사에서 보수의 원류는 거기서 찾는 게 합당하다. 그저 '개화'의 반대말로만 여긴 채 맹목적으로 암기하고 마는 공부는 되레 역사의식의 성장을 저해한다.
수업 시간 아이들도 황현, 최익현, 이회영 등의 이름이 거론되면 가슴 뭉클해하며 옷깃을 여민다. 그들에게선 언뜻 고지식해 보일 정도의 올곧음과 대쪽 같은 기개가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대의를 따르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하나뿐인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는 그들의 절의는, 그들이 지닌 역사관과 세계관에 동의 여부를 떠나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의 행적을 보수의 가치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마치 보수가 최근 만들어진 개념 정도로 여긴다. 심지어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체제인 영국의 정당사를 들먹이며 우리의 정치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아이도 적지 않다. 동서양의 보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다.
난상토론의 결말은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걸로 마무리됐다. 애초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개념이어서 토론 자체가 무척 조심스럽긴 했다. 교과서의 권위에 기대어 보수의 개념을 원용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진보는 '진보당 사건'을 비롯해 보통명사로도 종종 등장하지만, 보수라는 단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튜브로 배우는 위험한 이분법
'인터넷을 통하여 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가 가능해지면서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졌다. 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커지게 되었다.' (해냄에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00쪽에서 발췌)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다'는 주제 단원에서 이렇게 달랑 한 줄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TV나 인터넷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상 용어지만, 교과서에서 보수는 사실상 금기어처럼 여겨진다. 동아시아의 갈등과 평화 노력을 다룬 단원에서도 일본 정권을 '우파'로 통칭할 뿐 보수라는 용어는 일절 쓰이지 않는다.
결국 요즘 아이들은 보수에 대한 개념을 인터넷 포털과 유튜브 등을 통해 학습하고, 그게 정답인 줄로 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가 난무하는 유튜브가 교과서 역할을 대신하는 꼴이다. 얼마 전 한 아이의 '명쾌한 보수와 진보 구분법'을 듣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는데, 그를 나무랄 수 없었던 이유다.
'단순화하면'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그는 보수와 진보가 이렇게 나뉜다고 했다. 경상도 출신이고, 연령층은 60대 이상이며, 농어촌 지역에 거주하면 보수이고, 전라도 출신에 40~50대 중년층이고, 도시 지역에 거주하면 진보라고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물으니, 부모님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수와 진보를 온존한 지역주의와 뒤섞은 대단히 위험한 이분법이다. 지금의 여당이 보수고, 야당이 진보라는 아이들의 납작한 인식도 거기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부모 세대와 유튜브를 통해 주입된 편견이 진실로 둔갑하며 온갖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되고 있다.
요컨대,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보수와 진보에 관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하고, 교사는 기꺼이 촉진자가 되어야 한다. '교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운운하며 교사의 손발을 묶고 입을 닫도록 겁박해서는 곤란하다.
'공동체를 위한 멸사봉공의 헌신'이라는 보수의 가치가 존중받기는커녕 아이들의 입에서조차 '꼴통'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비유처럼, 보수가 본령에 충실할 때라야 진보도 건강해지는 법이다. '청년 보수'라고 쓰고, '극우 유튜버'로 읽는다는 한 아이의 일갈이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