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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사인 나는 경상도 사람들이 부럽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져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역사적 자긍심이 탐난다. 경상도는 권세에 기웃거리지 않는 선비 정신의 태 자리이자,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백절불굴의 산실이다.

모름지기 역사는 '인물사'일진대, 교과서에 거론되는 인물들의 절반 이상이 경상도 출신이다. 특히 근현대사 영역으로 좁혀보면 그 비중이 더욱 커진다. 누구는 대대손손 기득권을 누린 지역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눈을 흘기지만, 그건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편견이라고 본다.

물론, 억측이라 무지를 순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집권한 13명의 역대 대통령 중에 8명이 경상도 출신이다.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8개월짜리 대통령 최규하와 4.19 혁명 직후 내각책임제에서의 윤보선 대통령을 빼면, 대통령은 경상도가 독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골'의 땅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령 지산동 가야 고분군의 전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령 지산동 가야 고분군의 전경 ⓒ 서부원

다만 그것도 그래 봐야 최근이고, 해방 직후부터 일제강점기와 개항기까지 조금만 시야를 넓혀보면 경상도는 명실공히 '반골'의 땅임이 분명해진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개화 정책이 추진되자 이에 맞서 최초로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집단 상소를 올려 항일 의병의 불씨를 댕긴 곳이 경상도다.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기록된, 13도 창의군의 군사장 허위와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평민 의병장 신돌석, 동학농민혁명부터 국권 피탈 직전까지 모든 항일 의병 전쟁을 이끈 무관 출신 이강년 등 청사에 빛나는 의병장들이 경상도 출신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권 피탈 이후에도 그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출세가 보장된 판사직을 버리고 국권 회복과 친일파 처단을 목표로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박상진의 존재가 우뚝하다. 황제가 강제 폐위된 망국 직후였음에도 공화 정치의 실현을 내건 건, 경상도가 학문과 이념의 백화제방 터전이었음을 방증한다.

지금이야 생경하게 들릴 테지만, 안동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대한민국 사회주의의 본거지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다수가 이곳 출신이었다. 해방 직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으며, 1946년 10월 미군정의 친일 세력 중용과 식량 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중항쟁이 대구에서 시작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불세출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창립 멤버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이고, 1925년 창당한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도 안동 사람이다. 해방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국내로 송환한 아나키스트 박열도, 5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범 이상룡 가문도 모두 경상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며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도,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절정'의 저항시인 이육사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도, 그의 친형이자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의 남편이기도 한 이상정 장군도 모두 경상도 출신이다. 이념을 떠나, 경상도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경상도 어딜 가나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속된 말로 '발에 치인다'. 도로변 이름이 적힌 안내판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생가와 묘소, 사당 등 대의명분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그들의 자취를 만난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그 앞에 서면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도로변에 비석으로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자취

개천절이었던 지난 3일, 경북 고령엘 다녀왔다. 동서를 관통하는 '달빛 고속도로' 덕에 이곳 광주에서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단지 고령 읍내에 자리한 지산동 가야 고분군을 답사할 요량이었다. 작년 이곳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일곱 개의 가야 고분군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너른 주차장에 차 댈 곳이 마땅찮을 정도로 붐볐다. 외지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가 도로에 즐비했고, 휴일임에도 경찰과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교통 정리하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대가야 박물관과 고분 모형관은 물론,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수십 기의 고분들 사이를 걷는 인파로 종일 활기를 띠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읍내를 두리번거리다가 불현듯 이곳 출신의 독립운동가 두 분을 떠올렸다. 한 분은 신철휴고, 다른 한 분은 김상덕이다. 수업 시간 의열단과 반민특위 관련 내용을 다룰 때 언급되는 인물로,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름들이다.

신철휴는 '밀양 사람'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창립한 인물로, 1920년대 경북과 충북 지역의 의열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김상덕은 도쿄 2.8 독립선언의 주역으로,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을 역임하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독립운동가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역사 교사로서 민망하지만, 두 분의 고향이 고령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들의 자취를 찾아간 적은 없었다. 솔직히 그들의 자취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의열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여론이 여전한 데다 김상덕의 경우엔 6.25 전쟁 중 납북되어 그의 후손들은 연좌제의 고통에 시달려온 터다.

 고령 향교 옆 근린공원에 임정요인 남형우 선생의 기념비(사진 왼쪽)와 의열단 창립 멤버인 신철휴 선생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고령 향교 옆 근린공원에 임정요인 남형우 선생의 기념비(사진 왼쪽)와 의열단 창립 멤버인 신철휴 선생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서부원

그들의 자취는 근린공원과 도로변에 비석으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부러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에 기대어 두 분의 생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의 생가는커녕 이름을 아는 이조차 드물었다. 그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근처에 뭔지 모를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고 귀띔할 뿐이었다.

신철휴의 기념비는 고령 향교 옆의 근린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곳에선 이곳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한 분 더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법무 총장과 교통 총장을 역임한 남형우를 기리는 순국 기념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경상도 작은 시골 마을, 고령의 역사적 위상을 실감케 한 뜻밖의 수확이었다.

김상덕의 사적비도 걸어서 5분 거리의 이웃한 곳에 있다. 여느 비석과는 달리 타원형의 큼지막한 자연석에 글씨를 새겨 넣은 형태다. 콘크리트 받침대엔 그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곳에도 최영돈, 김재열, 곽태진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고령 주민들의 자긍심은 어디서 나올까

 반민특위 위원장을 역임한 김상덕 선생의 사적비(사진 오른쪽) 옆으로, 왼쪽부터 애국지사 곽태진, 김재열, 최영돈 선생의 현창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반민특위 위원장을 역임한 김상덕 선생의 사적비(사진 오른쪽) 옆으로, 왼쪽부터 애국지사 곽태진, 김재열, 최영돈 선생의 현창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서부원

일개 고을 고령이 이럴진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성지'를 표방하는 경상도의 역사적 자긍심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 고령 하면 죄다 '대가야'만 떠올리지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지산동 고분군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고령을 담고 있을 뿐이다. 고령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마땅히 이곳이 배출한 숱한 독립운동가부터 기억해야 할 일이다.

돌아오는 길, '대가야의 왕도, 고령'이라는 대형 홍보물에 시선이 머문다. 지산동 고분군이 고령을 먹여 살린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대가야'는 고령의 상징이자 전부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하다. '대가야의 왕도'에 산다는 이유로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이 과연 높아질까.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이 둘 중 어떤 답변이 고령 사람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까.

"저는 '대가야의 왕도' 고령 사람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고령 사람입니다."

#경북고령#신철휴#김상덕#유네스코지정세계문화유산지산동가야고분군#경상도출신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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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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