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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 행담도 하면 주로 떠올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0년까지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 우리 역사도 담겨 있다. 개발에 밀려 끊어진 행담도 사람들이 역사와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진시에서 최근 펴낸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주로 참고하고, 추가 취재한 내용을 보탰다.[편집자말]
 행담도 분교 학생들. 1970년대 후반.
행담도 분교 학생들. 1970년대 후반. ⓒ 이익주

1950년 중반부터 행담도 아이들의 취학연령이 늘어났다.

당시 행담도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는 한정국민학교(신평면 한정리 76-1번지, 아래 한정초, 1950년 개교)는 15km 남짓 떨어져 있었다. 배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오가야 해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다. 통학 여건이 마땅치 않자 마을 한 주민이 당시 이은영씨 집 사랑방에서 천자문 등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 형들은 서당을 다녔어. 한문 선생이 한 분 있었어요. 내가 그분은 기억을 잘 못 하는데 수염이 좀 길었었고 한문을 가르쳤어." - 한정만

1950년대 말 서울의 한 교회에서 청년들이 봉사를 위해 행담도를 찾았다. 이중 강전항이라는 청년이 눌러앉아 2년간 야학당을 열었다. 이 야학당도 한학을 가르치던 섬 주민인 이은영씨의 집 사랑방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행담도 휴게소 입구 쪽에 있는 가스 주유소 부근이다.

"한학 가르치던 사랑방을 조금 넓혀 거기다가 애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치더라고." - 한정만

배움에 대한 목마름

 행담분교 학교행사
행담분교 학교행사 ⓒ 이익주

1960년 7월 무렵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수산물 조사를 하러 행담도를 찾았다. 그중 한 학생이 같은 해 10월 학용품을 가지고 또다시 행담도를 찾았다. 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정을 접하고 37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당을 연 것.

1961년 3월 14일 <조선일보>는 '섬에 바친 젊은 꿈, 학업 중단하고 어린이 교육' 제목의 기사에서 이 학생의 이름을 조성우(당시 23세)라고 보도했다.

'경희대 조성우씨가 1960년 여름방학 때 행담도에서 수산물 조사를 했는데 그때 섬 어린이들이 가난과 물길에 막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걸 알고 같은 해 10월 학용품을 가지고 행담도에 내려와 섬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행담섬의 이은영 씨 집 한 칸을 빌려 37명의 어린이를 가르치고 있는 조 군은 어린이들의 사정을 감안해 2부제로 수업을 하고 있다.'

 1961년 3월 14일 <조선일보>는 '섬에 바친 젊은 꿈, 학업 중단하고 어린이 교육'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는 경희대학교 학생 조성우씨가 행담도 아이들을 가르친 일화가 담겼다.
1961년 3월 14일 <조선일보>는 '섬에 바친 젊은 꿈, 학업 중단하고 어린이 교육'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는 경희대학교 학생 조성우씨가 행담도 아이들을 가르친 일화가 담겼다. ⓒ 조선일보 PDF

 행담분교 동문들
행담분교 동문들 ⓒ 이익주

두 사람의 노력은 마치 심훈의 소설 <상록수> 속 주인공 동혁과 영신을 떠올리게 한다.

'창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에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 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조옥 매달려서 담 안을 넘겨다보고 있지 않은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도 기어오르지를 못하고 땅바닥에 가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장에 매어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다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을 하는 것 같다.' - 심훈의 소설 '상록수' 중에서

 행담분교에서 염소와 함께. 뒤로 '한정국민학교 행담분교'라는 푯말이 보인다.
행담분교에서 염소와 함께. 뒤로 '한정국민학교 행담분교'라는 푯말이 보인다. ⓒ 이익주

아이들이 배움에 목말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당진군이 나섰다. 야학당에서 하는 공부지만 학력을 인정해달라고 당시 문교부에 건의했다. 1961년 문교부는 야학당에서 한 수업에 대해 정규초등학교 교육과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행담분교 건립 공사도 시작됐다. 인부들이 시멘트를 싣고 배를 타고 들어왔다. 행담도에 있는 모래를 사용 시멘트 벽돌을 제조했다. 나머지 자재는 행담도에 있는 것을 이용했다. 행담도 앞 모래와 야산에 있는 나무를 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렇게 교실 1칸, 교사 숙소 1칸이 새로 지어졌다.

1968년 문교부는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를 인가했다. 행담분교와 당진경찰서 신평지서 행담초소(1977년 설치, 순경 1명 근무)는 행담섬에 있는 유일한 공공기관이었다.

그해, 행담분교 첫 부임 교사가 배를 타고 왔다. 그런데 그 교사가 봉사활동을 왔던, 행담도에 첫 야학당을 열었던 청년 강전항이었다. 강전항 청년이 교사로 위촉받은 것이다.

열악했지만 초롱초롱 빛났던 행담도 아이들

 행담분교에 다니는 한 학생이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고 있다. 1970년대
행담분교에 다니는 한 학생이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고 있다. 1970년대 ⓒ 이익주

하지만 교육환경은 심훈의 <상록수> 소설에 나오는 상황보다 더 열악했다. 칠판은 송판을 겹쳐 이용했다. 책상도 의자도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공부했고, 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적었다.

교실이 한 칸이라 전 학년이 한 교실에 앉아 공부해야 했다. 교실 한 칸을 백묵으로 금을 그어 세 분단으로 나눠 첫 분단에는 1학년 과정을, 가운데 분단은 3학년 과정을, 나머지 분단은 6학년 과정을 가르쳤다, 그나마 학생들이 1, 3, 6학년으로 1~6학년까지 골고루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어느 해인가에는 학생들이 한정초 본교에 가서 남는 책상과 걸상도 지게에 얹거나 들고 왔다.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몇 년 후에는 교사 가족을 위한 관사 신축 공사도 시작했다. 숙소는 교실 뒤쪽에 방 1, 부엌 1로 조그마했다.

"벽돌을 해변에서 찍었는데 책보를 이용해 나르던 기억이 나요." - 한정만

 행담분교 학생들
행담분교 학생들 ⓒ 이익주

행담분교 최초의 학생은 한남전을 비롯해 김진용, 한복남, 한정순. 권영애, 이은님, 성정순, 김양순 등 모두 8명. 이들은 1965년 한정초등학교 11회 졸업생, 행담분교 1회 졸업생이 됐다. 이후 입학생이 늘어나 많을 땐 분교생이 24명까지 늘어났다. 정교사는 1명, 급사 1명이 됐다. 정 교사는 학교 숙소에서 머물렀지만, 급사는 본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꼴이나 일이 있을 때 오가는 정도였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행담도의 교실 풍경으로 물때를 꼽는다. 행담도는 하루 네 번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물때는 계절에 따라 그 시간이 수시로 바뀐다. 행담도만의 교실 풍경은 썰물 때 이뤄진다. 아이들은 물이 빠질 때가 되면 수시로 창밖을 본다. 행담분교 유리창 너머로는 맷돌포 쪽 바다가 한눈에 들여온다. 그러다 한 학생이 말한다.

"선생님, 지금 물이 다 빠졌어요"
"그래! 수업 끝. 이따 오후에 다시 수업 시작할 테니 어서들 다녀와라."

 행담도에서 아이들은 어른 한 몫하는 일꾼이다. 학교 공부를 하다가 물이 빠지면 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으러 바다로 달려 나간다. 바닷일을 하다 물이 차면 다시 학교로 돌아야 수업을 이어갔다.
행담도에서 아이들은 어른 한 몫하는 일꾼이다. 학교 공부를 하다가 물이 빠지면 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으러 바다로 달려 나간다. 바닷일을 하다 물이 차면 다시 학교로 돌아야 수업을 이어갔다. ⓒ 이익주

행담도에서 아이들은 어른 한 몫하는 일꾼이다. 물이 빠지면 굴,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잡으러 바다로 달려 나간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자랐다. 그렇게 주경야독, 주독야경을 되풀이했다. 바닷일을 하다 물이 차면 다시 학교로 돌아야 수업을 이어갔다.

"학생들이 물이 빠지면 '선생님 물 다 빠졌어요' 하고 외쳐요. 집에 보내달라는 얘기죠. 굴 캐고, 바지락 캐는 일을 도와야 하니까요." -이익주, 한정만

교사들의 눈에 이런 학생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김명중 교사는 1970년부터 1972년 초까지 2년, 1983년부터 1985년 초까지 2년을 행담도에서 아이들과 보냈다. 당시 김 교사가 각각 34세(1970년), 45세(1983년) 되던 때였다. 김 교사는 당시 학생들이 "전부 눈망울이 새큼하니 반짝반짝하니 본교 아이들보다도 더 총명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할 때 다 똑똑해 보였어. 또 굴도 따고 집안일을 돕느라 놀 틈이 없고 어른들하고 이렇게 물때에 맞춰서 일하니 아이들이 생활력도 강해진 것 같아." - 김명중

 행담분교 운동장에서 한 교사가 아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1981년
행담분교 운동장에서 한 교사가 아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1981년 ⓒ 이익주

그도 처음 부임 전에는 주변 얘기만 듣고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남루하고 볼품없이 자랐을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배에서 내리는데 어른들과 아이들이 김 교사를 마중 나왔다. 아이들은 얼굴이 통통하고 눈동자가 빛났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 모두가 김 교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을 대하듯" 했다.

"학생들도 그렇지만 오고 가는 길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 정말로 조금 보태서 저를 하느님처럼 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주민들과 아이들 모습을 보고 '이 애들이 정말 보배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잘 가르쳐야 하겠다.' 생각하고 다짐했죠." - 김명중

그러던 중 서해안고속도로가 행담도를 통과하는 계획이 만들어지면서 섬 전체가 도로부지로 수용되고 말았다. 주민 전체가 강제로 행담도를 떠나는 상황이 초래됐다. 실제 1999년 섬 주민들이 모두 섬을 떠나야 했다.

문 닫힌 행담분교,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행담도 아이들
행담도 아이들 ⓒ 이익주

 행담도 학생들의 소풍날
행담도 학생들의 소풍날 ⓒ 이익주

하지만 교육 당국은 주민들이 이주하기 전인 1992년 3월 1일 행당분교를 폐교했다. 주민들이 이주하기 7년 앞서 학교부터 폐교한 셈이다. 행담분교를 다니던 김태선, 김태환, 이은미, 이지연, 이은정 학생 등 5명은 할 수 없이 한정초 인근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폐교할 때까지 23년간 행담분교를 다닌 학생은 남 34명, 여 32명으로 모두 66명이었다. 본교 마지막 부임 교사는 김영돈, 분교를 다녔던 마지막 학생은 이은정(한정초 42회 졸업생)이었다.

한정초 본교를 다닌 조정숙(20회 졸업생, 1973년)씨는 '행담도를 회상하며' 글을 통해 행담분교 학생들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6명의 행담분교 아이들은/ 배를 타고 뭍에서 버스로/ 한정초등학교 졸업식에 왔다/ 졸업식장에서 만나고 헤어진/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살았던 섬/ 행담도를 지그시 밟고 서 있는 서해대교/ 갯벌이 시커먼 속을 드러내면/ 바다를 벗 삼아 호미 들고 선생님 따라/ 조개 잡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

 행담도 주민들과 학생들이 행담됴 분교를 찾아오는 교사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다. (1980년 대)
행담도 주민들과 학생들이 행담됴 분교를 찾아오는 교사를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다. (1980년 대) ⓒ 이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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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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