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심장,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로
인천을 출발하여 세렝게티 사바나로 가는 길은 멀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를 거쳐 킬리만자로 공항까지 환승 대기 시간을 포함하여 모두 18시간 걸렸다. 출발할 때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킬리만자로 공항에서 보는 날씨는 저 멀리 산까지 보이는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다.
공항에서 팻말에 우리 이름을 써서 기다리는 현지 픽업 기사를 무사히 만나 세렝게티 사파리 투어의 출발지이자 킬리만자로 등반의 거점인 아루샤시에 여장을 풀었다. 아루샤시는 인구 약 30만, 해발 약 1,350미터의 고원 도시였다. 초여름인데도 고원 기후 덕분에 선선했다. 킬리만자로 국립공원도 여기서 한 시간 거리로 멀지 않았다. 호텔은 생각보다 좋았다. 풀장과 아름다운 정원, 친절한 종업원 등은 마치 유럽의 고급 리조트 시설에 온 것 같았다. 아프리카 오지란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경비행기를 타고 세렝게티로 날아갔다. TV 동물의 왕국에서 봤던 바로 그 세렝게티이다. 세렝게티 초원은 북부의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중부의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 그리고 남동쪽의 응고롱고로(분화구) 자연보존지역을 합친 지역으로, 거의 네덜란드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다. 차로 간다면 비포장도로로 약 5시간이나 걸려, 비용이 들더라도 경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게임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사파리 투어를 동물 찾기 게임과 같다고 게임 드라이브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사자와 코끼리가 누비는 초원을 지프 타고 지금부터 달리자고요? 혹시 공격당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TV의 동물의 왕국에서 보듯이 사자와 얼룩말, 누 때를 눈앞에서 보리라는 기대감은 바로 지루한 기다림과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한참을 울퉁불퉁한 길도 없는 초원을 돌아다녔지만 풀이 길게 자란 초원과 영양 몇 마리만 보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가 갑자기 차를 멈춰 가리키는 곳을 봤더니, 하마가 있단다. 그런데, 물속에 숨어 잘 보이지 않았다.
세렝게티 사바나에서 동물은 물을 찾아 계절에 따라 대이동을 한다. 1월~3월(우기)에는 남동쪽에 새끼를 낳아 키우고, 4월~6월(건기)에는 물과 먹이를 찾아 북서쪽으로 이동한다. 7월~10월은 북부에 있는 케냐 쪽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넘어간다. 이때 마라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물의 수위가 높고 악어들이 도사리고 있는 강을 건너는 모습은 장관이다. 11월~ 12월에 짧은 우기가 시작되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렝게티 남동쪽으로 돌아온다. 약 200만 마리의 누 때와 얼룩말 무리가 약 800킬로에서 1,000킬로의 거리를 이동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찾은 세렝게티 중부 지역에는 동물들이 별로 없고, 얼룩말이나 누 같은 초식 동물은 새끼를 낳고 양육하느라 남쪽으로 다 내려가 있다고 한다.
길게 자란 풀과 톰슨가젤(Thomson's gazelle). 사자는 어딘가 숨었을 듯했다. 진흙 속에 자세히 보면 하마 몇 마리가 보인다. 점심 먹고 다시 게임드라이브. 오후는 운 좋게 멀리서 코끼리, 기린, 임팔라를 만날 수 있었다.
거대한 자연 속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밖은 아직 깜깜했다. 앞도 보이지 않는 풀속 길을 한 시간이나 달려 벌룬 장에 도착했다. 벌룬을 타고 하늘에서 보는 사바나는 광활하고 조용했다. 열기구를 데우는 가스버너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적막만 흐를 뿐… 누의 울음 소리도, 코끼리의 울부짖는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세렝게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이 초원 위를 비추며, 그림자와 빛의 놀라운 조화를 만들어냈다. 갑자기 경외감이 밀려들었다. 사바나는 너무나 넓고, 거대하고, 평화로웠다. 인간의 존재감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에는 마사이족이 살고 있다. 마아시족은 원래 세렝게티 초원에 자유롭게 살았으나, 1959년 세렝게티 국립공원이 설립되면서 이곳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우리가 방문한 마사이 마을은 상업화된 모습이어서 다소 실망이었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해가 갔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아루샤로 돌아온 다음 날 킬리만자로로 향했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5,895미터로, 정상까지 등반하려면 고산병에 적응해 가면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4박 5일 정도는 잡아야 한다. 우리는 체력과 나이를 고려해 킬리만자로 주변을 돌면서 마테루니 폭포와 커피 농장을 보는 하루 코스에 만족하였다.
세렝게티는 평원이지만, 평균 해발 고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해발고도는 약 920m에서 1,830m 사이였다. 이 덕분에 기후는 생각보다 덥지 않아, 2월의 평균 기온은 15°C에서 26°C 정도였다. 새벽녘에는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다. 세렝게티에는 검은꼬리 누 떼와 얼룩말, 코끼리, 톰슨가젤, 그랜트가젤, 사자, 표범, 점박이 하이에나, 치타 그리고 그밖에 다양한 포식자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세렝게티 국립공원 한가운데 있는 공원 안내센터에서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KOICA) 마크를 봤다. 이런 곳까지 한국 지원의 힘이 미쳤다니… 반가웠다(공원 안내 미디어 센터 간판 밑에 KOICA가 작게 적혀있다).
아프리카의 꽃, 빅토리아 폭포의 장엄한 물보라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케냐 나이로비를 거쳐 빅토리아 폭포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빅토리아 폭포는 세렝게티 사바나와 달리, 인근에 관광 인프라가 잘 갖춰진 빅폴시와 리빙스턴시가 있어 아기자기한 볼거리, 즐길 거리, 그리고 다양한 숙박 시설이 편리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틀 동안은 빅토리아 폭포를 중심으로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오가며 폭포 주변 여러 즐길 거리를 즐겼다. 나머지 하루는 보츠와나의 초베 국립공원으로 가서 초베강 유역 초원의 동물들을 관찰했다.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의 잠베지강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지인들은 '모시오 아툰야'라 부른다. '천둥소리를 내는 연기'라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폭포는 보이지 않고, 밀림 사이로 높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천둥 같은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하늘에서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 위해 헬리콥터를 탔다. 엔진 소리가 점점 커지며 지상에서 멀어질 때, 아래에 보이는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자연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헬기에서 내려 폭포의 웅장한 광경을 배경으로 폭포 옆을 걸었다. 워킹 트레일은 짐바브웨 쪽과 잠비아 쪽으로 나뉜다. 두 나라 쪽 트레일을 모두 보려면 간단한 국경 통과 절차를 거쳐 계곡에 걸쳐있는 리빙스톤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트레일에 들어서자, 폭포의 굉음과 함께 폭포의 물방울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물보라가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가이드에 따르면, 세계 3대 폭포 중 높이로는 빅토리아 폭포가 가장 높다고 한다(약 108m). 세계 최고의 폭포를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는가는 다를 수 있다. 폭의 기준으로 보면 남미 브라질의 이과수 폭포가 가장 넓다(약 2.7km). 수량으로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장 많다(약 2,400 m³/s). 그래서 가는 곳마다 우리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해도, 거짓은 아니다.
보츠와나의 초베 국립공원은 빅토리아 폭포에서 한나절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도 까다롭지 않았다. 초베 국립공원은 초베 강변을 따라 사바나, 습지, 평원 등 다양한 경관이 펼쳐지는 곳으로 물가에서의 야생동물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특히 코끼리의 밀도가 높아 코끼리 관찰에 적지이다. 물을 마시러 오는 기린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광활한 초원과 아카시아 숲, 그리고 누와 얼룩말 떼를 특징으로 하는 세렝게티의 경관과는 또 다른 풍광이었다. 초베 국립공원의 일몰은 유명하다. 붉게 물든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대지,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걷는 코끼리의 실루엣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한다.
초베 국립공원에서 돌아와, 빅토리아 폭포 인근의 사바나로 야간 게임 드라이브를 나갔다. 밤중의 사바나는 낮보다 훨씬 살아 움직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연 속에서 특별한 뷔페식 저녁식사를 즐겼다.
어두워진 사바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가이드는 동물들의 시각을 보호하기 위해 붉은 적외선 라이트 사용하여 길을 비추었다. 이 붉은 빛은 사파리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갑자기, 낮에는 보이지 않던 사자가 길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는 어제 이 자리에서 기린 새끼의 울음소리와 사자의 포효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사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사냥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긴장감과 흥분이 솟아났다. 야간 사파리 게임 드라이브는 낮과는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흑인 차별의 아픈 역사와 빈부 격차의 착잡함
케이프타운 하면 흑인 차별 정책이 남긴 아픈 역사와 빈부 격차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파르트헤이트 즉, 흑인 차별 정책은 1994년에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지만, 그 여파는 현재의 도시풍경에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길에 대규모 빈민가 타운이 바로 보인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핵심 중의 하나가 인종에 따른 거주지 구분 정책이었는데, 흑인들은 오후 6시가 되면 백인들이 사는 마을에 통행증과 허가증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노동시간에만 백인 거주지역에 있고, 그 이후에는 그곳을 나와야 했다. 당연히 시내로 출, 퇴근이 편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케이프 공항과 가까운 랑가(Langa)에 대규모로 모여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1~1991년까지 인종을 차별하기 위해 인종 판별법이 실시되었는데, 피부색이나 머리 곱슬 정도와 같은 주관적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에, 볼펜을 머리카락에 넣어 곱슬 정도에 따라 부모와 자식, 형제가 다른 인종으로 판별나, 헤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고등법원 건물 앞을 지나며, 아직도 남아있는 백인 전용 벤치, 그리고 그 건물에서 인종 판별이 이뤄졌다는 안내판을 보고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케이프타운은 와이너리, 테이블마운틴, 희망봉, 보테닉 가든, 항구와 씨푸드 등, 여러 관광 포인트가 많기 때문에 여러 날 푹 쉬면서 활력을 충전해 갈 요량으로 4박 5일을 머물렀다. 사람에 따라 선호가 다르겠지만 여정을 마치고 돌이켜보니, 우리의 경우는 도시적 경관보다 보테닉 가든이나 자연경관이 더 좋았다.
테이블마운틴은 케이프타운의 상징이다. 그러나 자주 구름에 덮여있어 올라갈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여행 마지막 날 다행히 구름이 걷혀 테이블마운틴을 올라갔다. 산 정상에서 케이프타운의 전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선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희망봉은 케이프타운 교외로 멋진 해안도로를 달려 나가면 만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지리적 의미와 역사적인 탐험가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다. 그런데, 이를 느낄 수 있는 기념관 같은 것도 없이 바닷가에 팻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등대가 있는 뒤편 언덕에 올라 보는 해안선과 바다는 장관이었다.
케이프타운을 떠나며... 장벽에 갇힌 만델라의 꿈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한 '흑인 경제 활성화 정책(BEE: Black Economic Empowerment)'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은 흑인들에게 광산의 소유권을 주거나, 관공서 취업의 우선권 등을 줘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이다.
이 덕분에 흑인들의 지위가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일부에 그친다. 흑인 중 약 10%가 신중산층으로 부상했고, 우리가 남아공에서 만난 흑인 중에는 대학 졸업 후 지하철 중앙통제시스템 엔지니어, 광산 엔지니어 등의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남아공에서는 전체 인구의 8%를 차지하는 400만 백인에게 여전히 경제력이 집중해 있고, 아파르트헤이트가 공식적으로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통계를 보면 2023년 기준으로 남아공의 실업률은 약 32.1%에 달하며, 특히 젊은 층의 실업률은 60%에 육박한다. 한때 유럽 못지않은 활력을 구가하던 남아공 경제가 쇠퇴일로이다. 한편 백인들도 남아공을 탈출 중이라고 한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남아공 출신인데, 어릴 때 나갔다. 가이드 말로는,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백인들은 거의 나갔다고 한다. 인재가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은 의욕을 잃고, 남아공의 미래가 암울하다. 만델라가 평생을 바쳐 추구하던 통합과 화합의 꿈은 장벽에 갇혀 버렸는가?
나미비아는 대서양과 접해있는 나라로, 나미브란 'Nama', 즉 '엄청 넓은(아무것도 없는)' 어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엄청 넓고 아무것도 없는 나라이다. 국토 면적은 우리나라의 약 8배(82만㎢)이나, 인구는 약 260만에 불과하다. 1인당 소득 수준은 약 4,743 달러(2023년 기준)로 아프리카 상위에 속하나,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이다(불행히도 2위가 남아공이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빈곤 속에 살고 있다.
한때 남아공이 나미비아를 통치했기 때문에(1920년~1990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아픈 역사도 남아있었다. 19세기에는 독일도 식민통치를 한 적이 있어 독일풍의 건물도 남아있는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진 나라였다. 우리는 나미비아에서 나미브 사막과 휴양도시인 스와코프먼트, 샌드위치 하버, 그리고 수도 빈툭 에 들렀다.
나미브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해안 사막으로, 약 2,000km에 걸쳐 대서양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있으며, 해안과 사막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독특한 곳이다. 철분이 많이 포함된 모래 때문에 붉은 색깔이 나며, 태양 빛의 변화에 따라 붉은빛이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꽃보다 청춘'이라는 인기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 여기를 방문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나미브 사막의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모래언덕(듄, Dune) 지구(여기를 소수스블레이, Sossusvlei라 한다)와 데드블레이(Deadvlei)이다. 소수스블레이(Sossusvlei)란, 소금기 있는 점토의 바닥(vlei)이란 뜻인데, 수만 년 전에 말라 없어진 흰 강바닥 주변에 높은 모래언덕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듄 45(Dune 45), 빅 대디(Big Daddy)와 같이 높이가 거의 300미터가 넘는 모래언덕이 여기에 있다. 소수스블레이와 인접한 데드블레이는 말라버린 나무들이 서 있는 하얀 점토 바닥으로, 그 모습이 매우 신비로워, 사진작가들의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이다.
소수스블레이와 데드블레이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사막 길을 서너 시간 달려, 국립공원 입구에서 하루 숙박한 후, 일출을 기다려야 했다. 롯지는 럭셔리 텐트로 되어 있었는데, 사막의 열기를 다 막아주지는 못했다. 롯지에서 사막 저 멀리로 호수 같은 신기루를 봤다. 사막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때문인가.. 실감이 났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데드블레이에서 보는 일출은 마치 딴 세상에 온 것과 같았다. 햇볕이 모래언덕 저편에서 점점 붉게 비쳐 오면, 모래언덕은 붉은빛으로 바뀌고, 수만 년 전에 죽은 화석화된 나무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모래언덕과 하얀 점토판이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곳에 서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 중에서 걸작이었다. 곧 얼마 안 있어 관광객이 몰려오기 시작해, 점토 바닥이 사람으로 꽉 차, 고요한 풍경의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사막과 바다가 만나 빚어낸 대자연의 향연
스와코프먼트(Swakopmund)는 나미비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해변가는 대서양의 푸른 물결이 펼쳐지며 그 뒤로 펼쳐진 나미브 사막이 있어, 바다와 사막의 대조가 멋진 휴양도시였다. 독일 식민지 시대(1884~1919)에 건설되어 당시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19세기 유럽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샌드위치 하버는 대서양과 나미브 사막이 만나는 약 50km의 해안 길로, 이 독특한 곳을 달리는 드라이브는 잊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한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다른 한쪽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이곳에서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바닷가를 달리며 느끼는 감동은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과 전율을 주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미비아 수도인 빈툭(windhoek)으로 갔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데 약 5시간이나 걸렸다. 빈툭의 첫인상은 그리 크지 않은, 잘 정비되어 있고 깔끔한 도시였다. 도시의 중심가에는 큰 쇼핑가도 있고 백인과 흑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로는 판자촌이 즐비하고,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조차 갖추지 못한 지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빈툭의 나미비아의 독립 투쟁을 기념하는 국가 영웅기념비 (National Heroes' Acre)와 독립 기념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북한 만수대 건축양식이 눈에 띄어 의아했는데, 북한 건축업체가 와서 건축했다는 의외의 사실이 재미있었다.
크와헤리! 아프리카!
약 20일에 걸친 여정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세렝게티 더 넓은 평원과 은두투에서 본 생명의 향연 그리고 나미브 사막과 시간이 멈춘 듯한 데드블레이의 광경이었다. 아울러 많은 자원과 젊은 인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빈부격차, 분쟁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인들의 고단한 삶도 가슴에 깊이 남았다.
그러나 세렝게티 초원과 나미브 사막 같은 오지 한가운데서도 모바일과 전자결제를 편리하게 할 수 있는 IT의 빠른 보급은 아프리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나에게 아프리카는 단순한 여행을 넘어, 새로운 자연을 만나고 삶을 돌이켜 본 특별한 경험이었다
글 · 사진 박경 지역재단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