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좋아하면 더 잘 알고 싶어진다. 음악이며 음악가도 마찬가지. 즐겨 듣는 음악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얽힌 사연을 알고파질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와 가수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쉴 때는 무엇을 하는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를 알고 나면 그 음악 또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러나 음악가와 팬이 접촉할 수 있는 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이돌이야 여러 경로를 통해 팬들과의 만남이 이뤄지긴 하지만, 통상의 가수는 음반이나 콘서트, SNS 정도 말고는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것이다. 특히나 내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인터뷰 외엔 따로 없다는 점에서 알고 싶다는 팬들의 욕구는 해갈되지 않은 채로 남기 십상이다.
가수가 쓰는 책을 읽는단 건 그래서 귀한 경험이 된다. 가수의 일상과 단상, 세계관이며 가치관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그가 빚어낸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SNS에 제 일상을 남기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호흡이 긴 글이 전하는 깊은 이해와 비할 수 없다.
2019년을 빛낸 신인, 애리가 말하는 삶과 음악
<수많은 내가 다른 곳에 살고>는 가수가 쓴 책이다. 지은이는 애리(AIRY), 2019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신인상을 수상한 음악가다. 사이키델릭 포크, 몽환적인 인상을 던지는 음악세계를 구축해가는 그녀의 음악인생이 가볍게 풀어쓴 에세이 한 권에 담겼다. 우울과 불안, 관계에 대한 갈망과 혐오 등이 교차하는 각각의 글줄은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음악 창작자의 현실과 욕구를 한층 깊이 이해하도록 이끈다.
한순간의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날은 한순간의 기적이 내 앞에 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믿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남은 내 생에 정성을 다하기 위해 한순간의 기적을 믿지 않겠다고 다시 선언합니다. 한순간의 기적을 바라는 게 아니라 여러 순간마다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기적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9p
기적을 믿지 않던 그녀가 기적을 만난 듯한 기분을 느낀 건 출판사로부터 책 출간 제안을 받으면서다. 큰 상을 받았다곤 하지만 삶에의 근본적 변화는 느끼지 못하던 상태, 이런저런 일을 병행하지 않고는 음악만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한 때다. 그러던 차,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출판물을 쓰게 되니 발표한 곡들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시원하게 풀어내게 된 것이다.
책을 기획한 건 '출판공동체 편않'이다. 언론인과 출판인의 이야기를 담은 시리즈를 기획, 출간해온 이들이 이번엔 음악 에세이 시리즈 '흐름들'을 새로 펴내기 시작했다 전한다.
듀오그룹 '혹시몰라'의 이강국과 전영국을 저자로 한 에세이 <우리는 이것을 꿈의 수정이라고 생각했다>를 출간한 것부터 주목받는 음악가이자 꾸준히 곡과 글로 저를 표현해온 애리의 글모음집 <수많은 내가 다른 곳에 살고>를 내놓았다.
뮤지션으로 하여금 제 삶과 음악을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는 기획이 음악을 즐기는 이에게 감상의 새 장을 열어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책엔 힘들고 어렵고 고된 순간의 기록이 가득하다. 갈증이 난 듯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삶, 뒤틀리고 부정적인 자신을 직시하고 어떻게든 견뎌 나아가려는 의지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제 삶을 반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며 노래를 접하고, 교대 가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그 전까지 1등을 독식하던 친구를 울게 만든 일 같은 소소한 에피소드도 한켠에 담겼다.
중학교 때는 밴드를 하고 싶었으나 어찌저찌하여 풍물부에 들어갔다고. 그곳에선 장구를 쳤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실용음악 동아리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느린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을 뒤로 하고 '아주 빠른 가사를 외우고 무대에서 소리를 지르며 이상한 몸짓으로' 노래를 하게 된 것이다.
우연처럼 음악을 접하고 밴드에서 노래까지 하게 된 애리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스물아홉이 되어 첫 앨범을 낸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받는다. 후보에 선정된 것만도 얼떨떨한 일인데 상까지 받다니. 감정이 복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고 했다.
꺾이고 부러져도 음악은 남는다
매순간 승승장구한 건 아니다. 도리어 좌절하고 실망할 때가 많았다. 앨범을 내기 전에 오디션 프로그램이며 음악 매체 출연을 위한 지원서를 여럿 냈지만 죄다 낙방했다고 했다. 예선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해를 건너 2019년이 되어 신인음악가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EBS 헬로루키 예선 심사에 붙었고, 이펙터가 고장나는 등 엉망진창의 공연을 펼쳤음에도 대상을 수상한다.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신인상과 헬로루키 대상, 한국 신인 음악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2019년 연달아 차지한 것이다. 그녀에게 이건 어떤 의미였을까.
2019년에 받은 두 개의 상으로 많이 안정을 찾았다. 무례했던 사람들도 더 이상 나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다. 무례한 사람들이 줄기도 했지만, 나도 예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디엔가 또 갇히기 시작했다. (중략) 내 인생의 절정은 여기까지일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었으나 생활이 무너지고 내가 무너지며 창작 활동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56, 57p
한편으로 책은 애리에게 다가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함께 살았던 이들, 제게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 또 저를 인정해주고 도움을 준 선생님이며 친구들, 잠시잠깐 외로움을 달래려 만났던 이들이 바쁘게 언급된다. 그들과의 에피소드가 때로는 곡에 직접적 영감이 되기도 하고, 삶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창작은 언제나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애리는 그렇게 나아가고 변화한다.
애리의 이십대는 우울과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심리상담을 받고 병원을 다니기도 했으나 꾸준하진 않았다. 서른이 넘고 삶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야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정감이며 무덤덤한 마음을 얻는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가사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 창작자의 삶이라 해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 삶 가운데서 곡이 태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곡이.
책은 매 장마다 애리의 노래가 태어난 배경을 적는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곡의 가사와 함께 곡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까지 삽입해 놓았다. 말하자면 곡과 에세이의 기묘한 결합이다.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닌 음악가의 글인지라 조금 정돈되지 않고 감성에 따라 마구 나아가는 듯한 인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특정한 곡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만큼, 읽는 이는 음악과 삶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