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책보를 둘러매고 집으로 향하는 소녀 순형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가 상급학교(중학교)를 보내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동막리와 주변 마을에 사는 대다수 친구들이 상급학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순형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잔심부름하고 부엌데기처럼 사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소녀는 몇 달 동안 고민했던 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영자야(가명). 우리 시험 공부하자!" "뭐 하려구?" 순형의 제안에 영자는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돈이 없어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텐데, 뭐하러 공부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순형이 상급학교 보낼 꺼유?
하지만 순형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상급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면 호죽의 공민학교(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에 갈 거야!" "정말?" 순형의 말에 영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순형의 야무진 성격을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순형은 친구들이 시험 공부하는 것을 엄두를 내지 못하자 혼자서 시험을 준비했다. 만약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아버지가 상급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면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에 있는 공민학교에 가겠다는 배수진을 치고서 말이다.
그런데 순형은 어떻게 그런 파격적인 생각을 했을까? 동막에서 호죽리까지는 약 40리(17km)나 되는 거리인데 말이다. 거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큰언니 조정숙이 정진동과 결혼해 호죽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른 후 소녀 순형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런데 소녀의 엄마 박금순은 한술 더해 마음이 새카맣게 탔다. 딸래미가 상급학교 시험에서 합격했다는데, 남편한테 상급학교 입학 문제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금순 모녀가 가슴앓이를 하던 어느 날 작은골 사는 김OO이 찾아왔다. 이내 개다리소반에 술상이 차려졌다. 술이 얼근하게 됐을 때 김씨가 입을 열었다. "순형이 상급학교 보낼 꺼유?" "..." 김씨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빠 조춘흥은 멀뚱멀뚱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김씨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순형이 입학 안 시킬 거면 내 딸래미 보내려구요." 김씨는 순형이가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면 자신의 딸을 상급학교에 보내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상급학교 입학은 정원이 있기에 순형의 입학 여부가 중요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조춘흥은 입을 다물었다.
김씨가 돌아간 후 조춘흥이 딸 순형을 불러 앉혔다. "어떤 놈은 (상급학교 시험에) 떨어졌는데도 보내려구 하는데, 누구는 합격했는데도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순형은 그때까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이어지는 말에 순형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순형아. 중핵교(중학교) 가거라!"
경찰 목덜미 잡아당겨
다음날 박금순은 쌀장수에게 쌀을 팔아온 돈을 순형이 손에 쥐어줬다. "아부지 맘 변하기 전에 얼릉 입학금 갖다 내거라" 그렇게 해서 조순형은 미호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순형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년 후 고등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물론 이때는 순형의 부모뿐만 아니라 순형 자신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 마냥 구들방 신세만 질 수는 없었다. 청주시 서문동에 있는 편물학원을 3개월간 다녔다. 집안 언니의 편물 가게에서 일했는데 돈벌이가 안 됐다. 그는 그곳을 때려치우고 한복학원에 다녔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한복을 입는 여성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재봉틀로 한복을 지어 시장에 납품했다. 한복은 예상보다 잘 팔렸다. 돈은 벌었지만 순형의 마음은 허전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 나이 24세 때인 1972년도에 일신여고에 입학했다. 7세 차이 나는 동생들과 같이 다니는 학교생활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순형은 1년도 채 못 다니고 학교를 작파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973년도에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 2학년 때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재판을 구경하러 가게 됐다. 무슨 투철한 의식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 갔다가 그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서대문구 서소문에 위치한 대법원 정문에는 하얀 소복을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 재판받는 이들의 엄마들이었다. 법원 정문에 경찰차가 주차돼 있었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 선교사가 그 버스 바퀴(타이어) 바람을 빼고 있는 게 아닌가.
당시 경찰은 툭하면 시위가담자들을 경찰버스에 태워 서울 외곽 곳곳에 내려놓았다. 마치 쓰레기 버리듯이 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미비했던 그 시절에는 그것만큼의 고역도 드물었다. 그랬기에 외국 선교사는 재판과정에서 있을 경찰들의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저놈 잡아!"라는 소리와 동시에 사복형사가 선교사의 뒷덜미를 잡을 찰나였다. 그런데 선교사의 뒷덜미를 잡으려는 사복형사의 뒷덜미가 조순형의 손에 덜컥 잡혔다. 무방비에 뒷덜미를 잡힌 형사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년 잡아라"며 과녁이 조순형을 향했다. 기겁한 조순형은 무작정 달렸다. 조지송 목사 일행 속으로 몸을 숨겼다.
민청학련사건 재판을 보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를 접하면서 조순형의 전통적인 기독교관에 변화가 생겼다. 개인 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의 일등 공신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 때문이었다.
방학 때 청주에 내려가 넝마주이를 하는 정진동의 모습을 보고서다. 충북노회의 결정으로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없어지자 가장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다는 마음으로 정진동이 넝마주이를 했을 때다. 서울에서 인명진 목사가 응원을 왔다. 이때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촬영했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놓기 위해서다.
조순형은 정진동을 보면서, 조지송을 만나면서 살아있는 예수를 봤다. "도시산업선교회로 가자"라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정진동을 찾아갔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저 굶어 죽어요!" 일자리를 위한 실랑이
삼화전기를 지나자 머리가 깨질듯한 냄새가 진동했다. 인근 조광피혁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순형은 '한국갈포'라는 회사 간판 앞에 섰다. 수위실에 들어섰다. "뭔 일유?" "일자리 구하러 왔어요" "..." 뜨악한 표정을 짓는 경비아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찾아온 여성이 20대 후반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 신규채용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관행이었다.
"아저씨. 저는 여기서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라며 졸랐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 안 된다는 실랑이가 30여 분 지났다. 경비가 할 수 없이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심히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 취업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갈포 공장의 노동환경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조순형이 일하게 된 현장은 벽지에 돌가루를 뿌리는 특수벽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생산과정에서 돌가루가 날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눈만 따가운 것이 아니라 숨도 못 쉴 정도였다.
회사에서 보호장비로 준 것은 천마스크가 유일했다. 마스크는 10분도 채 안 돼 새카매졌다. 침을 뱉으면 목에서 빨간 가래가 나왔다. 죽을 맛이었지만 조순형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노동 체험은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교육의 필수과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무조건 일해야 되고, 불만을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일이 고되다고 공장을 그만둬선 절대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순형은 모든 노동자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남녀를 불문했다. 특히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친언니처럼 대하며 잘 따랐다.
조순형은 저녁이나 주말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취방에 수시로 놀러 갔다. 포장마차로 호떡과 순대를 사 먹으러도 갔다. 주말에는 밤을 새우며 수다를 떨었다. 노동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친자매처럼 끈끈한 정이 생겼다. 3개월간의 노동 체험을 마친 후 서울행 보따리를 쌌다. 영등포산업선교회로 실무교육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이다.
옷과 화장품보다 중요한 것
"당원(糖源)은 조금만 넣으세요." 요리 강사의 말에 수강생들은 귀를 귀울였다. 조순형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노래, 꽃꽃이, 요리 교실에 모두 참관했다. 뿐만아니라 근로기준법, 노동법 교육에도 수강생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
그런 후에 그룹 강의를 했다. 20여 명의 여성 노동자 앞에서 특정 주제의 강의를 하는 것이다. 조순형은 고민 끝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옷, 화장품, 연애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사람은 외모를 가꾸어서 아름다워지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것은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고 쟁취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에요."
조순형의 열변에 참석자들이 박수 세례를 보냈다. 이 강의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그룹(소모임)에 반복적으로 강의를 해야하는 것이다. 매번의 강의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실무교육의 마지막 단계는 '노동자 조직화'이다. 처음에는 청주사람이 서울에서 노동자를 조직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순형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룹 강의 때 만났던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얘들아. 내가 잠잘 곳이 없는데 한 달간 재워 줄 수 있니?" "그래요"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에 흔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조순형은 영등포산선에서 2개월간 숙박을 했다. 그런데 이 일로 숙박과 노동자 조직화 문제가 동시에 해결됐다.
조순형이 서울에서 실무교육을 받을 당시 해태제과는 한창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할 때였다. 하루 12시간 근무에 주 7일 근무였던 해태제과에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해태제과 노동자들과 몸을 부대끼고, 조지송 목사의 지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 그 속에서 조순형은 살아있는 노동교육을 체험했다.
교회 오빠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교회 오빠 오희진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한국갈포 여성노동자들이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치는 오희진은 충북대 영어교육학과 출신으로 우연히 청주산선에 와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특히 한국갈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래 교실은 인기가 좋았다.
조순형은 서울에서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교육을 받으면서도 주말에는 청주에 내려왔다. 한국갈포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노동자 교육과 조직에도 힘썼다. 물론 교육은 주로 정진동이 맡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77년 10월 31일 한국갈포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초짜 실무자 조순형이 힘을 보탠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