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372-1 평화관광교육관에 '연천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이 탑은 2008년 7월 15일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탑의 명문 〈연천 지역 항일 독립운동〉에는 2008년 8월로 새겨져 있다. 아마 탑 건립식이 예정보다 한 달쯤 앞서 거행되었나 보다.
연천에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구한말 우국지사들이)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강고한 의병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현충시설정보서비스의 연천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취지'의 핵심 내용을 읽어본다.
특히 1905년 ~ 1910년의 시기에는 연천 출신이거나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의병장 및 지도층과 많은 의병부대들이 연천·삭녕·마전(현재 연천지역)일대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 강점기로 전락하기 직전인 1910년을 전후로 무자비한 탄압 및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 일제의 폭압에도 마지막까지 항일 의병운동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1919년 3월 21일 백학면 두일리 장날에 모인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는 항일 의병운동의 전통을 발하던 연천의 항일 독립의지를 선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기념탑에는 독립지사 마흔 분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연기우', '이은찬' 두 분이 낯익다. 허위 의병대장의 활동을 살펴볼 때 등장했던 지사들인 까닭이다. 연기우는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켰을 때 허위 의진에 가담해 큰힘을 보탰고, 이은찬은 김산(경북 김천)에서 허위가 처음 창의했을 때 함께 궐기했었다.
'허위' 앞에 '허겸'이 보인다. 허겸 지사가 앞에 새겨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허겸 지사가 형, 허위 의병대장이 동생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니나 다를까,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허겸' 부분은 "허겸은 의병대장 허위(許蔿)의 형으로 경상북도 선산 출신이다"로 시작된다.
동생 허위 의병대장을 도와 구국운동에 투신
허겸 지사는 1896년 3월 허위가 김산에서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해 의진을 일으켰을 때부터 동생을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어 자신의 형이자 허위의 둘째 형인 허훈이 경북 청송에서 진보의진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곳으로 달려가 소모(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저항해 일어난 전국의 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령을 맞아 자진 흩어지고 말았다. 허훈과 허겸의 진보의진과 김산의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나라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이었다.
허겸은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고종과 조정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허겸은 을사오적 암살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1907년 허위가 연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함께 싸웠다.
을사오적 암살 기도, 연천에서 일본군과 전투
하지만 1908년 10월 21일 동생은 순국했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온 집안을 억누르면서 국내에 머무르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1910년 망국까지 당하면서 어린 조카들을 포함해 일가족이 언제 어떤 위기에 내몰릴지 알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허겸은 1912년 동생 허필, 조카 허형(허위의 아들) 등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만주에 머물면서 김동삼·유인식과 함께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해 한중 친선과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했다.
경학사 후신 부민단 창단해 초대 단장으로 활동
또 망명 조선인들의 자치 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사이 독립운동을 하던 조카 허형이 1918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 허위와 조카 허형을 죽음으로 떠나보냈으니 그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을 것이다.
1922년에는 71세 고령이었음에도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86세나 되는 노구를 이끌고 또 다시 만주로 망명해 다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쇠약하고 늙은 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39년 10월 21일 마침내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동생 죽고 서른한 번째 10월 21일을 맞은 허겸
10월 21일이 어떤 날인가? 동생 허위 의병대장 순국 서른한 번째 기일이다. 그런데 조카 허형은 이미 40대 나이로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측하자면 허겸은 아마 이날 허위 의병대장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숨이 막혔으리라.
나라는 망했고, 동생도 조카도 죽었는데,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어찌 그 나이에 더 몸을 지탱할 수 있었으랴! 오랫동안 광야에서 목놓아 운 허겸, 조국 독립을 못 보고 이 세상을 하직했지만 분명히 한 사람의 "초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리라.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