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청년들끼리 만나면 서로서로 자기 지역이 얼마나 더 열악한지 겨루는 서글픈 입씨름을 농담처럼 하곤 한다. 어느 함양 청년은 타지 사람들이 함양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른다고 푸념했다. 최학수도 그런 함양을 누구보다 떠나고 싶었다.
지역신문 <주간함양> 기자이자, 함양 청년 모임 '이소' 운영진인 최학수. 함양 지역 행사에서 종종 만났던 최학수는 항상 취재용 카메라를 들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미소는 느긋하게, 걸음은 빠르게. 그런 그와 늘 스치듯 인사를 나누곤 했다. 드디어 지난 9월 24일 동네 책방 '오후공책'에서 차분히 그와 마주 앉았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경남 함양으로 돌아온 얘기부터 해달라고 했다. 지금의 최학수를 설명하려면 거기서부터 이해해야 했다. 누구보다 떠나고 싶었던 함양에, 왜 다시 돌아와 살기로 했는지.
"(제게는) 시골에서 난 사람의 결핍이 좀 있어요. 저는 (결핍이) 엄청 컸어요. 디지털 네이티브니까 내가 디지털로 보는 세계보다 주변은 항상 부족한 거죠. 중학생 때도 그랬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그래서 함양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함양 밖으로 나가면서 '함양에는 다시 오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대학 가서 교내 활동이나 대외 활동도 엄청 활발하게 했어요. 힘들긴커녕 너무 재밌었어요. 그렇게 대학교 잘 다니고, 군대도 갔다 오고, 실컷 놀다 보니까 돈이 떨어졌어요."
돈이 떨어져서 고향에 돌아왔다니, 너무 단순한 이유라 허탈한 웃음이 났다. 아니 너무 친근한 이유라서일까.
"시기가 절묘했어요.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거든요. 그리고 군대에서 적금을 넣은 돈으로 제주살이를 잠깐 했어요. 그러다가 진로 결정을 더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돈도 떨어졌어요. 진지하게 다음 스텝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었죠. 그때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당장 도시로 나가서 집을 구하려면 보증금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 했어요. 그러다 신문사 공고를 보게 됐어요.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사진 찍는 거 좋아하고, 영상 만드는 거 좋아하니까. 적당히 적성에 잘 맞겠지 하고 들어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함양에 오래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최학수는 대학생 때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 제주살이를 하면서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쌓아나갔다. 수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도구로 글쓰기와 사진, 영상을 즐기던 것이 신문사 취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20년 내내 살아온 고향은 더 답답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국토대장정과 이야기 |
"부산에서 서울까지 대학생 144명이 한 번에 걸어가는데, 72명씩 줄로 두 줄로 쭉 서서 걸어가는 거죠. 50분 걷고 10분 쉬다가, 다시 출발할 때가 되면 줄 서서 50분 걷고 그런 시스템이에요. 10분 쉬고 오면 옆 사람이 바뀌어 있는 거예요. 휴대폰도 다 걷었고, 걸으면서 딱히 할 게 없잖아요. 그럼 옆 사람이랑 이야기하며 걷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어느 대학교 다니세요? 무슨 전공 하세요?'로 매번 똑같이 시작하는 대화지만 때마다 그 뒷이야기가 다 달라지거든요. 그 50분 사이에요. 그걸 3주 동안 매일 한 거예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는 되게 재밌고 소중하다는 감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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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와 이야기 |
"제주에서 게스트 하우스에 계속 있었는데, 항상 새로운 사람들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랑 대화하면서 남들 인생 찍먹해 보는 게 너무 흥미롭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사람들 인생이 너무 궁금하고,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영감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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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능할 지도 몰라, 함양에서 재밌게 살기
스무 살에 떠난 둥지 함양으로 6년 만에 돌아왔다. 나그네 같은 마음으로 함양에 온 지가 어느덧 4년, 이제는 함양에 엉덩이도, 마음도 붙이고 주인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난 함양을 떠날 거니까, 뭐' 이런 마음이 늘 기저에 있었는데 그게 한 번 확 뒤집어진 그 순간이 있어요. 서하다움(*서하다움: 함양 서하면에 위치한 청년레지던스플랫폼)에서였죠.
대학생 때 가끔 고향집에 오면 빈둥(*빈둥: 함양읍에 위치한 마을활력공간) 소식을 접했고, 그런 걸 통해서 빈둥 협동조합이 함양의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그런 빈둥을 이끌었던 김찬두 대표님이 서하다움도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걸 취재과정에서 알게 됐고요.
제주에서 생활할 때부터 도시재생이랑 지역살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때쯤 청년 마을 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SNS에서도 많이 보였어요. 그렇게 다른 지역에서나 보던 '우수 사례' 같은 것이 함양에도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서하다움에서는 지역살이 경험을 통해 지역과 관계를 맺고 지역을 이해해나갈 수 있는 '2주 살아보기', '삶일놀이캠프'와 같은 프로그램이 열린다.)"
최학수에게 함양은 이전까지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곳'이었다. 흔히 토박이들이 그렇듯, 함양은 새로울 것이라곤 없는 곳, 결핍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었다. 그런데 도시 청년들이 함양에 와서 살아보며 새로움을 느꼈다고 할 때, 함양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함양 청년 모임 '이소'도 만들어졌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최학수의 함양 인생을 바꿔놓았다. 함양에 남아 뭔가 더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서고부터 최학수는 확실히 더 바빠졌다. 그의 활동들은 한층 더 방향이 잡히고 깊이가 더해졌다.
"이전까지는 제 생각의 종착점은 함양이 아니니까, 함양을 늘 과정처럼 여겼던 것 같아요. 근데 이때 처음으로 기사에 진심을 담아 하나하나 엄청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그걸 인연으로 2022년 봄, 서하다움에서 했던 '소셜다이닝'에도 가게 됐어요. 거기서 함양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바뀌었어요. 저는 그날 온 사람들, 공연들이 다 기억날 정도로 좋았어요. 그때 더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러면서 2022년 10월에는 '거함산 청년 문놀장' 같은 큰 행사도 함께 기획해 보게 된 거에요."
지역신문 기자 '본캐'와 청년활동가 '부캐'가 만나면
"예전엔 언론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지역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이 조금 더 컸던 것 같아요. 2023년쯤부터는 두 정체성이 되게 잘 어우러졌어요. '저연차 지역 언론의 기자'가 본캐(본캐릭터를 줄인 신조어)라면, '청년 활동가'는 부캐(부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본캐와 부캐가 서로 영향을 주고, 활동을 돕기도 하는 선순환이 제 안에서 잘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역 언론인을 저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생각하게 된 게 청년 활동이었고, 지역 신문의 기자로서 청년 활동을 주목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더 확장됐던 것 같아요."
그의 욕심을 응원하고 싶다. 농촌에서 보기 드문 청년, 기자. 그 두 가지 역할을 잘 버무려 소화해 내는 최학수의 활동은 새로운 역사다. 지금 최학수라서 할 수 있는 활동, 그 고유한 영역을 계속 다듬고, 쌓고, 넓혀가고 있다.
"'이렇게 열정 있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기자를 해야 되는데' 같은 말씀을 하는 분들도 계세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 제가 도시에서 시작했다면 절대 이런 사명감으로 일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지역에 대한 애정이 중심이 돼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뭐 다른 데서 기자 생활을 해본 건 아니지만, 지역에서 기자를 한다는 게 좀 다른 것 같아요. '풀뿌리 저널리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지역에서 특히 언론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는 거죠. 부패 감시나 그런 기능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응원이 필요한 작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잘 다루어내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솔루션 저널리즘'이라고도 하는데 기사를 쓰면서 단순히 상황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해결책을 낼 수 있는지 그런 힌트를 행정에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저는 어떻게 보면 '활동가'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제가 함양 사람이고, 청년 세대이면서 이 지역신문의 기자라는 게 다 모여서 결국은 지역의 소멸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되는 것 같아요. 사명감도 생기고요."
그렇게 두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순간은 바로 청년 최학수가 기획한 행사에 기자 최학수가 취재를 가기도 하는 상황.
"처음에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 두 가지가 너무 붙어 있다고 느꼈어요. '내가 기획했는데 내가 취재하면 당연히 좋게 쓸 수밖에 없지'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실제로 2023년에는 청년 모임 이소 관련 기사를 거의 안 썼어요. 지금도 조금 어려워요.
근데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그때는 엄청 엄격하게 피하려고 했거든요. 오히려 회사 회의에서 '이소에서 이런 저런 행사 있던데, 왜 기사 안 썼냐'고 물어보시기도 해요. 그럼 '다음부터 쓸게요' 하고 넘기곤 하는데, 내적으로 항상 고민이 되긴 해요. 내가 이렇게 기획하고 기사를 쓰는 게 맞는 상황일까.
그런데 한 편으론 기자로 일하면서 제일 만족스러울 때는 제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들에게 제안해 볼 때예요. ('오후공책' 벽면에 붙어있는 행사 포스터들을 가리키며) 저런 것도 저희가 기획했고, 제가 기사로 쓰기도 했거든요. 제가 기획하거나 취재한 것들이 지역에서 '먹히는' 경험을 하면서 계속 자신감을 얻어가는 것 같아요. 제가 기자라는 것만으로 제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주려고 하는 상황도 저한텐 큰 자신감이 돼요."
최학수는 기자의 무게를 늘 생각하고, 안이한 태도를 늘 경계한다. 자신감을 쌓아가며 자만하지 않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마 근면성실을 지향하는 것이 그의 비법이 아닐까 싶다. 지역사회 입장에선 반짝반짝 재주 많은 청년이 나타나 이렇게 '일당백'을 해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다음 기사 <
눈앞에 다가온 지방 소멸, 그가 시도한 해결책>으로 이어집니다. https://omn.kr/2araj )
진행 / 넉넉
글 / 푸른
인터뷰 일자 / 2024년 9월 24일
글쓴이 : 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임팩트 그라운드'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후원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기획, 운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