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우리 가족은 인천에 위치한 드림파크에 다녀왔다. 드림파크는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를 생태 공원으로 조성한 인천의 대표 녹지 공간이다.
지금처럼 바람이 차갑지 않았던 때라, 장시간 외출이 힘든 외할아버지도 함께 드림파크를 찾았다. 오랜만에 자연을 마주한 할아버지는 어딘가 모르게 자유로워 보였다.
우리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을 맞이하여 이번 영상 주제를 '나들이'로 정했기 때문이다.
느지막한 오후쯤 드림파크에 도착한 우리는 1시간가량 자연을 만끽했다. 아직 개화되지 않은 꽃이 많아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하는 나들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가족들이 한참 자연의 공기를 맡고 있을 때, 나는 휴대전화로 할머니를 촬영하느라 바빴다.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 느낀 것인데, 일단 모든 상황을 영상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야 더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제 야외 촬영이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우리가 함께한 첫 야외 촬영은 집 앞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영상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할머니는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셨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짧은 야외 촬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 서는 할머니가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위기를 기회로
즐겁게 촬영을 마친 뒤, 나는 편집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영상에 소리가 녹음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촬영용 마이크를 휴대전화에 연결하여 사용하는데, 영상을 천천히 확인해 보니 마이크의 전원이 꺼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필 드림파크에 들어선 시점부터 마이크의 전원이 꺼진 탓에, 이후로 할머니의 목소리는 물론 그 어떤 소리도 녹음이 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영상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니. 그렇다고 재촬영하기에는 무리가 있던 터라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내레이션'이 떠올랐다. 요즘 유튜브 콘텐츠를 보다 보면 영상에 목소리를 따로 녹음하여 업로드하는 방식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도 할머니가 직접 내레이션을 한다면 오히려 영상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선뜻 "그러자"라고 말씀하지 못하셨다. 할머니의 평생 콤플렉스가 바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부터 할머니는 당신의 굵은 목소리가 싫었다고 하셨다. 친구들은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졌는데, 나의 할머니 귀녀씨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서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늘 피하고 싶었다고 하신다. 굵은 당신의 음성이 남들에게는 놀림거리가 될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목소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귀녀씨는 당신의 중저음 목소리를 그저 평생의 콤플렉스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야만 했다.
그 때문에 이번 영상에 내레이션을 넣어보자는 나의 이야기에 선뜻 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도 종종 "내 음성이 이상하지 않으냐"며 물어보곤 하신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중저음 보이스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고 해서 다 높고 밝은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또 귀녀씨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차분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어서 오히려 듣기 편하다.
콤플렉스 극복을 위한 첫걸음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칭찬하며 설득했고 결국 귀녀씨는 내레이션을 녹음하게 되었다. 마침, 집에 녹음용 마이크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서둘러 대본을 작성했고, 귀녀씨는 그 대본을 몇 번씩 읽고 고치며 당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발음과 문맥까지 꼼꼼히 따져가며 83년 생애 첫 도전을 준비해 나갔다.
드디어 녹음이 시작되었다. 떨리는 공기가 조용히 우리를 감쌌다. 일단 연습으로 가볍게 녹음해 보기로 했다. 귀녀씨는 스피커로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가 여전히 어색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얻는 듯했다.
"여기서는 조금 더 신나게 말해야 되겠는데?"
"여기는 부드럽게 말해야겠다."
녹음 시간이 길어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대본을 체크하며 할머니만의 표현으로 흡수해 나가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결국 성공적으로 인생 첫 내레이션을 완성해 냈고,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영상에 입혀 최종적으로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영상 바로보기)
완성본을 마주한 귀녀 씨는 "아이고, 진짜 저게 괜찮을까?"라며 걱정했지만, "그래도 말은 잘한 것 같으네(웃음)" 하고 말하며 환히 웃어 보였다.
이렇게 귀녀 씨는 83년 평생 콤플렉스였던 당신의 굵은 목소리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직은 어색한 마음이 크지만, 지금도 영상을 계속 돌려본다는 할머니의 말에 나 역시 힘을 얻는다.
그리고 할머니가 새롭게 나아갈 그 길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80년을 넘게 살아왔어도 도전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해내는 나의 할머니, 아니 이제는 어엿한 유튜버인 귀녀씨를 보면서, 오늘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