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헌의원 임기가 2년이어서 빨리 치르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점차 인식이 바꾸었다.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독주와 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의 추종 집단인 88구락부가 주도하고 포병소위 안두희가 범행에 나서 김구를 암살하고,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폭주가 극심했다.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1950년 5.20선거에 김규식·조완구·엄항섭 등을 제외하고 여러 사람이 입후보했습니다. 이 선거를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보수·진보의 보혁 대결이라고 하기도 해요. 한민당과 이승만 추종자들이 보수 또는 친일을 대표했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통일문제 등 민족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대표했어요. (주석 1)
유림도 참여를 결정했다. 독립노농당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2년 사이에 정치 판도가 크게 변하였다. 제헌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29명을 제명하면서 당세가 급속히 약화되고 선거자금이 없었다.
당의 결정으로 고향인 경북 안동2구에서 입후보했다. 10대에 '충군애국'의 혈서를 쓰고 3.1독립만세에 앞장서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6년여 옥고를 치르고, 임시정부의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지내는 등 평생을 조국독립운동에 바친 지난 역정을 되돌아보며, 이제 해방된 나라의 자주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순회 연설에서 밝혔다.
5.20 선거 당시 독노당 후보로서 출마한 유림은 무소속의 김익기와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투표함 뚜껑이 열리자 김 후보자가 1만 3천 68표를 얻은 반면 유림은 9천 4백 38표를 얻어 낙선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다.(그러나 같은 중경 임정 국무위원 출신인 조소앙은 서울 성북구에서, 장건상은 부산 을구에서 다득표 순위에서 전국 1, 2위를 기록하였다) (주석 2)
정가에 나도는 말이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이 선거에서 떨어지면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한다. 유림은 예상과 달리 안동에서 낙선했다. 그의 위상이나 경력으로 보아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그가 받은 충격은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보다 차원이 높은데 있으므로 패배를 큰 의미가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가 끝나고 얼마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유림과 독립운동가들이 분단정부를 수립하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강철교가 파괴되어 피난길이 막혔다. 서울에 잔류했다가 대구를 거쳐 어렵사리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서 유림은 이승만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서울을 공산당에게 넘겨주고 자기만 살자고 빠져나와 시민들을 희생시킨 책임을 이 대통령은 느끼고 있는가? 책임을 느낀다면 왜 한마디 사과가 없는가?"
전쟁 중에 이승만을 비판한 유림은 '괘씸죄'에 걸려 3개월 가량 재판 없는 옥살이를 겪기도 했다. (주석 3)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의 행태는 용납하기 쉽지 않았다. 국토방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미뤄두더라도 국난의 극복보다 권력연장에 온갖 수법을 동원하였다. 거창민간인학살사건, 국민방윈군사건을 비롯 부정비리가 만연했다. 이승만은 임기만료가 가까워지면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하기 위해 강압적 수단으로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원내 분포는 이승만과 등을 돌린 한민당 계열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 무렵 한민당은 이 대통령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밀어내고 자파가 실권을 장악하려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준비하였다. 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고, 이승만 주도로 직선제 개헌이 진행되었다. 이 개헌안도 부결되자 이승만 측은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하여 난동을 부리고 1952년 5월 25일 경남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집권연장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강행했다.
이승만 정권은 오로지 권력연장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의 견인차로 끌고가서 협박했다.
어느날 해공 신익희가 유림의 거처를 찾아왔다. 중경임시정부 시절 함께 국무위원을 지내는 등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단독정부에 참여하고 국회의장을 맡고 있었다. 신익희가 간곡하게 말했다.
"단주(유림의 아호), 우리는 과거 친한 동지 사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한 사이 아닌가? 이제부터 같이 힘을 합쳐 독재자의 손길에서 구민운동을 해보세."
신익희의 말을 다 듣고난 유림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맞받았다.
"그래, 해공!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내가 이승만의 첩하고 타협을 해? 차라리 구국타협이라면 이승만하고 하지."
이같은 유림의 질타는 신익희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협력, 국회의장에 올랐던 것을 비판한 것이지만 옆의 사람들도 면구스러울 정도로 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말술을 사양않듯 대인의 풍모를 지닌 신익희는 그저 '허허'하고 웃으면서 '단주, 과거는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네. 용서하시게'라고 달랠 뿐이었다.
그러나 유림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동지고 팥죽이고 간에(신익희가 '과거의 동지' 운운한 점을 비꼰 얘기임) 기생첩과 같은 사람과는 타협할 수 없네."
유림의 고집스러울 정도의 결벽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석 4)
주석
1>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55쪽, 역사비평사, 2008.
2> 최갑용, 앞의 책, 131쪽.
3> <단주 유림 자료집>, 259쪽.
4> 앞의 책, 132~13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