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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이 태어난 양구에는 '국토정중앙면'이 있다. 말 그대로 남북한 합쳐 우리나라 국토의 정중앙이 바로 양구다. 또 유일하게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마을이 있는데, 시래기로 유명한 펀치볼이 있는 해안면이다. 그 모양이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펀치볼로 불린다.

 박수근 미술관 공원 풍경
박수근 미술관 공원 풍경 ⓒ 문하연

박수근 미술관은 조경이 아름다운 넓은 공원에 박수근 기념 전시관, 현대미술관, 파빌리온, 라키비움(Larchiveum), 어린이 미술관까지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박수근 기념관과 라키비움(미디어 아트전)에서는 그의 전시가 상설로 열리고, 현대미술관과 파빌리온에서는 때마다 기획 전시가 열리는데, 기획 전시도 볼 때마다 만족도가 꽤 높았다.

박수근과 아내 김복순

다시 찾은 미술관엔 가을이 눈부시게 내려앉아 있었다. 박수근이 아내를 처음 만났던 빨래터에도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가 시냇물에 퐁당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즐기고 있다. 또 그 앞엔 그가 아내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빨래터 그림과 함께 세워져 있다. '빨래터'는 2007년 경매에 나와 45억 2천만 원에 낙찰되어 당시 최고가를 찍었던 작품이다.

박수근은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다녔고 그림은 독학으로 공부했다. 미술 강연을 가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예술가의 실력은 타고난 재능이냐? 아니면 노력이냐?" 난 이렇게 답한다. 내가 아는 한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 천재는 없다고. 하물며 모차르트도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혹독한 훈련을 받지 않았는가! 재능은 기본이고 그 위에 노력이 얹혀야 진짜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박수근 미술관엔 <박수근: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박수근은 절구질하는 여인, 노상에서 물건을 파는 여인,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 등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고, 그것에 비평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굴비
굴비 ⓒ 박수근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가면 처음 마주치는 작품이 바로 이 그림 '굴비'다. 1950년대, 한국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 화랑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직한 '미쓰 박'에게 박수근은 약속했다. "미쓰 박 시집갈 때 내가 그림 한 점 선물하지"라고. 하지만 '미쓰 박'이 결혼하기 전에 박수근은 작고 했고, 이를 알고 있었던 아내 김복순 여사가 그녀가 결혼할 때 이 그림을 선물했다.

'미쓰 박'은 현재 갤러리 현대의 박명자 회장으로 박 회장은 2002년 유화 한 점 없이 개관한 박수근 미술관에 이 그림을 기증하면서 미술관이 소장한 유화 그림 1호가 될 수 있었다. 일개 점원에게 그림을 약속한 박수근도, 그 약속을 지킨 김복순 여자도, 흔쾌히 그림을 기증해 준 박 회장도 세상없이 멋지다.

박수근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돌에 그린 것처럼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들이 많은데, 화강암을 연상케 하는 이 그림들의 시작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던 소년은 근처에 널린 돌멩이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양구에는 실제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이 많다). 12살에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소년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학벌도, 지도해줄 선생님도 없는 소년은 잡지에 나온 유명 그림들을 가위로 잘라 스크랩해서 자기만의 화집을 만들고 따라 그렸다.

 봄이 오다
봄이 오다 ⓒ 박수근 미술관

18세가 되던 해, 박수근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첫 입선을 하고 화가에의 꿈에 바짝 다가섰다. 이후 25세까지 5번의 입선을 하고 운명의 여인을 만나는데, 바로 김복순 여사다. 첫눈에 반한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편지 내용은 빨래터 그림과 함께 있다).

 빨래터 그림과 박수근의 편지
빨래터 그림과 박수근의 편지 ⓒ 문하연

그런데 초졸인 박수근과 달리 김복순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배운 여자'고, 이미 배필로 정해놓은 부잣집 의사 아들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수근은 그만 몸져누워 버렸다.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한 아들을 보다 못한 박수근의 부친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내 아들만큼 네 딸을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라고 따졌다. 결국 김복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은 데 성공한 부친 덕에 박수근은 김복순을 아내로 맞을 수 있었다.

박수근 작품에 담긴 것들

한국전쟁 이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졌다가 극적으로 상봉한 박수근은 1952년 미8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하면서 박완서와 만난다. 이 일화를 모티브로 박완서가 집필한 소설이 나목이고, 나목이 박완서의 데뷔작이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 사람의 인연이 특별했기에 박완서의 증언에 가까운 기록들이 전시실 벽 곳곳에 채워져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간 글은 '박수근 30주기 기념전'을 보고 난 후 박완서가 쓴 글의 일부다.

"(...)내가 그의 유작전을 처음 본 게 60년대 말이었는지 70년대 초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근래의 전시회에 비해 상당히 썰렁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값이 비싸다는 것을 그때 거기서 처음 알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놀라움이 지나쳐 억울하고 분해서 가슴이 아릴 지경이었다.

50년대 초, 한때 그와 한 일터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그가 얼마나 신산스럽고 굴욕적인 환경에서 싸구려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나를 보아왔고, 죽는 날까지도 그림으로 호강 한번 못해보고 그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온 게 고작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에 오른 그림값이 남 좋은 일만 시킨 것 같아 억울했던 것이다.

나의 속물근성으로는 사후의 영광보다 생전에 명성도 좀 누리고 경제적 풍요도 좀 즐기지 못한 게 아쉽고 분해서 정작 그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

 나무와 두 여인
나무와 두 여인 ⓒ 리움미술관

이 그림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나오는 작품이다. 박완서는 앙상한 저 나무가 죽은 고목이 아니라 생명을 품고 있는 나목이며, 이는 우리가 지금 힘들지만, 그 안에 희망(봄)을 품고 있다고 표현했다.

박수근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는 사계절 모두 잎 하나 없이 앙상한데, 이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하는 서민들의 혹독한 상황을 표현한 거다.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돈을 모은 박수근은 창신동에 10평 남짓한 집을 마련하고 전업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그의 최고작들이 쏟아졌다. 작업실이 따로 없었기에 '마루 아틀리에'에서 작업했다.

그는 매일 아침 10시부터 4시까지 규칙적으로 작업했고, 그가 작업하는 동안 큰딸은 막내를 업고 동네를 서성였다. 아래 그림이 바로 큰딸이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길가에서'다

 길가에서
길가에서 ⓒ 개인소장

그는 석탑이나 석불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돌의 거친 물성에 집중해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울퉁불퉁한 질감을 만들기 위해 말리고 덧칠하는 작업을 수도 없이 하느라 엽서 세 장만한 크기의 작품도 한 달 반이 걸렸다.

이런 그의 작품은 주로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당시,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이토록 평범한 주제를 우리 스스로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인들의 눈엔 박수근의 그림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진실한 그림, 간결하지만 슬픔, 향수, 아련한 감정까지 느끼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는 그림.

당시 반도 화랑에서 한 달에 두어 점 팔릴 만큼 인기가 있었고, 주로 서양인들이 기념품 정도로 사는 경우가 많았기에 작품 크기가 작았다. 호당 천 원에 거래되었는데, 그는 주로 3호 정도 되는 작품을 그려 팔았기에 삼천 원이면 그의 작품을 살 수 있었다.

그의 품성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평소 그는 물건을 사도 늘 노상에서 샀고, 한 사람에게 사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나눠서 샀다. 팔지 못한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혹여 살 물건이 없을 땐 사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미안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선함이 인격에도 녹아 있다.

1962년에는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에서 초대전을 열기도 했으며 그 무렵 든든한 후원자도 생겼다. 하지만 박수근은 간경화로 투병 중이었고, 백내장까지 와서 결국 왼쪽 눈을 실명하고 만다. 눈으로 보고 그려야 하는 화가가 실명이라니.

 줄넘기하는 아이들
줄넘기하는 아이들 ⓒ 박수근 미술관

이 그림은 '줄넘기하는 아이들'이란 작품인데, 박수근 미술관이 2018년 경매에서 4억 6천만 원에 낙찰받아 미술관으로 돌아온 작품이다. 1963년 그가 백내장으로 실명할 무렵 그린 그림인데, 유독 윤곽선이 불분명한 것은 그의 눈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같은 해에 그려진 비둘기 또한 윤곽선이 희미해 마치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의 후원자이자 그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했던 마가렛 밀러도 미국에서 그의 작품을 사진으로 접하고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묻는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런 변화는 백내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후 작품에 다시 윤곽선이 드러난 작품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평생 개인전을 열지 못한 박수근에게 마가렛 밀러는 미국에서 박수근 개인전을 제안하고 준비한다. 하지만 1965년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란 말을 마지막으로 박수근은 눈을 감고 만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박수근의 영혼을 만나는 장소

 박수근 동상
박수근 동상 ⓒ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 미술관은 그가 태어난 생가에 지어졌고, 미술관 한쪽으로 부부의 묘지가 나란히 있다. 또 아내와 첫 만남을 했던 빨래터도 아름답게 재현되어 있고, 인근에 앉은 박수근이 그 빨래터를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은 단지 그 작품을 보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그가 태어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죽기까지 전 생애가 들어 있다. 그러니 내게 박수근 미술관은 그의 영혼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양구는 아파트 외벽에도, 도로 벽에도 박수근의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예술가 한 사람이 한 고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잘 볼 수 있는 곳이 양구다. 예술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더 많은 사람이 와서 그의 작품을 즐기고 그의 우직하고 선한 마음에 감동받았으면 좋겠다.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면 양구에 들러 미술관도 보고 시래기 요리도 먹고 양구 사과도 유명하니 맛보면 좋겠다. 시래기든 사과든 이왕 사시려거든 한 곳에서 사지 마시고 근처 못 팔아서 속상한 사람이 없도록 나눠서 사보는 것도 좋겠다.

양구에는 또 꽃섬과 한반도섬이 있어 산책하기도 좋다. 양구가 먼 곳 같아도 소양강 꼬부랑길이 아름다우니 드라이브 삼아 간다면 행복하단 마음이 절로 우러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했던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 도록과 박수근 미술관 전시장의 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박수근미술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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