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뭘까? 어떤 사람은 영감을 얻기 위함이겠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통해 위로를 얻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자주 가면서 가끔 아쉬울 때가 있다. 고가의 작품이기에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지나치게 엄숙한 분위기로 관람객을 통제하거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의자조차 없는 경우가 그렇다.
위안과 감동을 얻으러 왔다가 이런 미세한 불편감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기도 하는데, 여기 전혀 그럴 위험이 없는, '집 같은' 미술관이 있다. 더구나 이곳 작품 규모가 역대급이다.
집처럼 꾸민 미술관
국민 화가인 박수근부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1, 2위를 다투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제프 쿤스, 이름이 명함인 피카소,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르네 마그리트,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죽음과 부패로 세상을 놀라게 한 데미안 허스트, 등 그 이름을 다 열거하기도 벅찬 세계 최고 작가 작품들을 500여 점이나 소장한 곳.
더 놀라운 건 이 어마어마한 작품의 소유자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자라는 점이다. 1973년, 23살의 나이에 직장에서 받은 보너스로 첫 작품을 샀는데, 그게 박수근의 드로잉 작품이란다. 당시엔 미술 작품으로 재테크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기인데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림을 샀을까.
말만 들어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곳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구하우스 미술관이다. 이곳 관장은 우리나라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로 현재 디자인 포커스 대표인 구정순 회장이다. 그러니까 '구하우스'는 굳이 따지자면 '구씨 집'인 거다.
구 관장은 집처럼 미술관을 꾸민 이유에 관해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구 관장님은 실제 그곳에 거주한다). 우리가 모두 알만한 KBS, KB 국민은행, CGV, CASS, COEX 등 수많은 회사의 로고 디자인이 그녀의 손끝에서 나왔다.
구하우스 미술관은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인데, 보는 각도와 빛의 방향에 따라 외관의 문양이 다채롭게 변한다. 그 이유는 외관 벽돌을 픽셀레이션(pixelation) 방식으로 쌓아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 모양이 변하기 때문인데, 이런 모습은 마치 사물이면서 생물 같기도 하다. 또 빛이 없어 움직임이 멈춰 있을 때는 견고하고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실내에는 크고 작은 창이 많아 채광도 좋고 시각적으로도 시원하다.
이 미술관의 최대 장점을 두 가지 꼽자면, 첫 번째로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2021년 양평군 아름다운 정원으로 선정될 정도로 잘 가꿔진 정원에는 사계절 야생화가 피고, 곳곳에 조각품들이 널려있다.
또 주거 공간처럼 꾸며져 있어 다른 미술관과 비교해 공간 구성이 색다르고, 가구 작품의 경우 실제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이 사진은 2층 전시실 창에서 정원을 찍은 건데, 가을이 내려앉은 정원이 그림 같다. 전시실 안과 밖이 모두 작품인 셈이다.
조지 나카시마 가구부터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까지
서재로 가보면 2층까지 뚫려 있는 공간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의 '모빌, 르코르뷔지에'가 있다. 자비에 베이앙은 조각, 설치, 회화, 사진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로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안경을 낀 남자의 오른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고, 담배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는 구름이 되어 뭉게뭉게 천장으로 올라간다. 이 작품은 르코르뷔지에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는데, 안경과 담배가 그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르코르뷔지에(1887~196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공공 주택을 만든 사람으로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 작품은 르코르뷔지에가 만들었던 집합주택 옥상에 실제 전시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르코르뷔지에 뒤로 보이는 소파는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으로 나무로만 만들어진 작품은 코노이드 벤치(conoid bench)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는 세티(settee)라는 작품이다. 코노이드 의자는 스티브 잡스가 선택한 걸로도 유명한데, 예술 작품에 관심 많기로 유명한 BTS RM도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었다.
조지 나카시마는 나무 본래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인체 공학적으로 편안한 작품을 연구한 가구 작가인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코노이드 의자다. 나무 결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목판에 빗살 하나하나 깎아 못질 없이 홈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원추형 빗살이 등을 안아주듯이 편안하게 받쳐줘 딱딱해 보이지만 상당히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고가의 진품을 보기도 귀한데 직접 앉아 보고 그 자리에서 책도 읽을 수 있으니 꼭 앉아 보시길!
거실 벽을 가득 채운 이 작품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람회의 그림들'이란 작품이다. 작품 속 사람들은 모두 호크니의 지인이다. 호크니는 자신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지인들 각자의 사진을 찍고, 그것들을 합성해 대형 프린터로 출력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이 작품도 그렇게 만든 것이고) 그의 이런 작품을 '사진드로잉'이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살아 있는 화가 중에 가장 영향력 있고, 비싼 화가로도 유명한데 현재 87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며 왕성한 창작을 선보이고 있다(2018년 그의 회화 작품 '예술가의 초상'이 경매에서 1019억 원에 낙찰, 당시 최고가를 찍었다).
재밌는 점은 그림 속 의자와 같은 의자를 작품 앞에 비치해 저 의자에 앉아 그림을 보면 마치 그림 안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림 속 사람들 사이 호크니도 있으니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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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의 '시계태엽 장치' 한 여자가 좁은 공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가 갑자기 달려드는 추를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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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하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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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은 스위스 미디어 아티스트 마르크의 'clock work(시계태엽 장치)'란 작품이다. 작품 속 여자는 좁은 합판 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힐끔 보다가 여자를 향해 달려드는 추를 가까스로 피한다.
여자가 서 있는 좁은 공간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제약을 표현한 건데, 무거운 추가 여자를 향해 달려들 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게 된다. 여자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추에 부딪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작품만 봐도 메시지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여자가 느끼는 위협과 공포, 내 눈엔 그렇게 읽혔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개인적으로 전시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인 어윈 올라프의 열쇠 구멍(keyhole)이란 설치 작품이다. 어윈 올라프(Erwin olaf)는 영상과 오브제를 결합한 작품을 주로 만드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사람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둥근 방 외벽에 걸려있고, 양쪽 문 앞에는 두 개의 의자가 각각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열쇠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이 보인다. 외벽에 걸린 초상화는 열쇠 구멍 속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양쪽 구멍에선 각기 다른 화면이 보이는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관음적 모습을 풍자한다. 눈을 대고 열쇠 구멍을 통해 타인의 가정을 몰래 훔쳐보면 묘한 쾌감과 동시에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생기는데 이게 작가의 의도인 것 같다.
정원을 통해 별관으로 이동하면 빛의 마법사 제임스 터렐의 작품도 볼 수 있고, 찬란한 유리 작품으로 벽면이 채워진 아름다운 화장실도 있다. 또 기획전으로 '픽셀 그라운드'와 '젊은 7인 아트컬렉터의 이야기'도 전시 중인데, 젊은 아트컬렉터 전시는 말 그대로 젊은 미술품 구매자 7인이 내놓은 작품들로 각각 방이 꾸며져 있다. 미술 컬렉팅을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방문해 보면 좋겠다.
또 내년 5월,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인 서도호 작가와 해외에서 더 유명한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의 작품도 있다.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을 이끌었던 막스 에른스트의 설치 작품과 20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 장 쿠르베의 방도 볼 수 있다. 사실 회화도 많은데, (내 생각) 구하우스의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현대 작가의 설치 작품 위주로 소개했다.
예술은 공유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구하우스 미술관은 갤러리계의 종합선물 세트 같은 곳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이 다 작품이다. 더 좋은 점은 홈페이지에 작품과 해설이 공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고 나서 놓친 것이 있는지, 내가 본 작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집에 돌아와 편하게 찾아볼 수 있다.
구정숙 관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예술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란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이 소유한 작품들을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미술관 관람 수입으론 미술관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 한참 못 미치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그 적자 폭을 메우고 있단다.
미술 종합선물 세트를 받고 싶다면 구하우스 미술관으로 달려가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아름다운 정원도 걸어보시길. 정원에는 공놀이를 무척 좋아하는 융이란 잘생긴 강아지가 있으니 (사진 속 융이 공을 물어다 내 앞에 놓고 빨리 던지라고 눈빛으로 압박 중이다) 정원에서 융을 만나거든, 잊지 말고 공도 한 번 던져주시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