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
정말 유난히도 더웠던 해였다. 언제쯤 물러가나 싶었던 더위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이제 활터(국궁장)에도 쌀쌀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니 활 역시 귀신 같이 그 물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현대식 카본 활의 경우 계절 상관없이 늘 일정한 장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내가 쓰는 전통 각궁의 경우 참나무, 산뽕나무, 물소뿔, 소힘줄, 대나무, 민어 부레풀 등이 들어가는 재료의 특성상, 계절과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계절이 바뀌면 장력의 차이가 발생한다.
날이 덥고 습한 여름에는 활이 물러져서 평소보다 화살이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반대로 겨울에는 활이 뻑뻑해지면서 장력이 급격히 올라감에 따라 화살이 멀리 날아간다. 그래서 여름에는 편하게 쏘던 활이 겨울에는 당기기 힘들어져 화살을 끝까지 당기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에 따라 각궁을 쓰는 사람들은 여름용 활, 겨울용 활을 구분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뜻밖의 선물, 화살 10발이 생기다
나의 경우 작년에 생일 선물로 받은 각궁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계절 구분 없이 그 한 자루만 줄기차게 써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계절의 변화와 함께 활이 급격하게 세진 것이 느껴졌다. 활이 물러지던 여름과는 정반대로 너무 뻑뻑해진 것이다.
그 탓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당길 수 있었던 화살이 이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다 당겨지질 않았다. 화살을 다 당기지 못하니 자연스레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이 일정하지 못하고 명중률도 떨어졌다.
이를 지켜본 한 선배 접장님이 "겨울에는 조금 짧은 화살을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화살 값이 어디 애들 장난감 가격인가. 전통 죽시는 한 발에 4만 원에 이르는데, 보통은 4순(20발) 이상 구매를 하는 게 기본이기에 가격을 다 합치면 약 80만 원에 이른다. 대학원생 지갑 사정으로는 보통 사치가 아니다.
차일피일 미루며 화살 주문을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날 화살 구매를 권했던 접장님이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김 접장, 화살 새로 주문했어?"
"아뇨, 지금 돈이 없어서..."
"자, 이거 쓰고 싶으면 써."
그러면서 성큼 죽시 10발을 건네신다. 만만찮은 가격의 화살을 뭉텅이로 주시니 감사한 마음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선다.
"아이고, 이 귀한 걸. 제가 돈 드릴게요."
"됐어. 쓰던 건데 뭘. 열심히 써."
활터에 대한 선입견... 직접 경험해보니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화살이 무려 10발이나 생겼다. 새로 받은 화살을 활에 걸어보니 끝까지 잘 당겨졌다. 쏴보니 날아가는 궤적도 안정적이었다.
활과 화살의 궁합도 중요한데, 선물로 받은 그 화살들은 내 활에 잘 맞는 좋은 화살이었다. 주변에서는 "그 화살 나 주지"하면서 부러워하는 분들도 계셨다.
생각해보면 선배들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국궁을 시작한 뒤로, 죽시며 화살통이며 심지어 비싼 각궁(합성궁, 활)까지 받은 적도 있다. 선배들로부터 받기도 참 많이 받았다. 물질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마음들이 얼마나 감사한가.
선배 궁사들은 평소에도 "학생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내게 밥이며 술이며 늘 사주려고만 하신다. 국궁동아리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활터를 방문했을 때는 "국궁의 미래인 학생들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다"며 따로 용돈을 쥐어주시는 분도 계셨다. 매번 받기만 하는 게 송구스러워서 손사래를 치면 "앞으로 후배들 들어오면 똑같이 잘해줘"라는 답이 돌아왔다.
물질적인 배려만 받았던 게 아니다. 승단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승급심사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심사 일정이 늘 수업이 있는 날과 맞물려 참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날짜를 바꾸기 민망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사정을 파악한 심판 분께서 11월에 열릴 심사 날짜를 일부러 수업이 없는 날로 잡아주시기도 했다. "이번엔 꼭 승급에 성공하라"라는 따뜻한 격려와 함께.
"활터에는 꼰대들이 많다", "활터는 너무 폐쇄적이다". 세간에 이런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문제가 있는 곳도 많다고 들었다. 또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기에, 모두가 내게 친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부 사례들 때문에 국궁장이란 곳이 꼰대들의 집합소처럼 비춰지는 게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터들도 많다.
나 역시 어른들이 볼 때는 한참 어린 'MZ세대'이지만, 나보다 더 어린 궁사들에게 똑같이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젊은 궁사들이 활터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들로부터 받은 '빚'을 갚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지' 다짐하는 이유
사실 나는 평소에 "인복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아왔던 사람이다. 과거에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상처를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내가 베풀고 나눈 만큼 사람들이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혼자 서운해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인복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어른들로부터 과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인복이 없다는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던 게다.
그러니 나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선배들로부터 받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더 베풀고 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해본다. 비단 활터에서뿐만이 아니라 일상을 통틀어 말이다. 베풂의 미덕을, 나는 활터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