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
청년층 취준생 63만 명, 고립 청년 54만의 시대다. 이들은 점점 좁아지는 '취업문'에 꿈, 결혼, 출산 등 미래를 하나씩 포기한다. 이젠 '힘내'라는 응원도 버겁게 느껴진다. 청년들은 대신 더 소박한 것을 원한다. 그저 지켜보고, 들어주고, 믿어주기를. 있는 그대로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나 또한 청년층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탁한다. 서재를 핑계 삼아 하는 내 일상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
"'잘못한 게 있으면 딱 집어서 이 부분은 잘못한 거 아니냐'라고 해주시면 제가 거기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 11월 7일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습니다. (중략) 결과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홍명보 한국 축구팀 감독, 지난 7월 축구 감독 선임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2024년은 '대국민사과의 해'라 부를 만큼 공인들의 사과가 많았다. 데이터 분석 플랫폼 '빅카인즈'에 따르면, 올해 '사과'와 관련한 언론보도는 무려 27,456건에 달한다(11월13일 기준). 이처럼 잦은 공식 사과에도,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은 '실패한 사과'로 인해 마지막 회생 기회마저 잃는 경우를 자주 본다. 오히려 사과의 빈도가 늘면서 그 무게감마저 떨어졌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그렇다면 대중들이 실패한 사과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가해자들은 사과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실패한 사과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모욕을 준다
실패한 사과의 대표적 예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미안합니다"처럼 구체적인 설명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비는 경우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낮은 자세로 사과를 표했지만, 정작 "무엇에 대해 사과하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세간에) 오가고 있어 설명이 어렵다"고 답해 많은 사람의 공분을 샀다. 이처럼 가해자가 자신이 초래한 피해를 설명하지 않은 채 사과할 때, 피해자는 고통을 표현하고 이해 받을 기회를 잃는다.
실패한 사과 중에서도 가장 기분 나쁜 유형은 '조건부 사과'일 테다. "기분이 상했다면 죄송합니다" 같은 표현이 그 예다. 이런 사과는 마치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는 여지를 남겨 두면서, 스스로 세운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는 행위인 듯 정당성을 부여한다. 동시에 피해자의 예민함이 문제라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도 준다.
조건부 사과의 친구 격으로는 '수동태 사과'가 있다. 지난 7월, 홍명보 축구 감독은 '한국대표팀 감독 선임' 논란에 대해 "내 안의 무언가가 시켰다"고 해명해 자신의 감독직 결정을 타자화했다. 자신을 '그렇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사람'으로 포장하면서 스스로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실패한 사과들은 피해자에게 불충분한 사과로 받아들여지며, 2차 가해행위로도 여겨질 수 있다.
사과는 왜 어려울까
그렇다면 실패한 사과를 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사과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아론 라자르의 책 <사과에 대하여>에 따르면,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과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과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다. 피해자가 혹 앙심을 품지 않을까,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사과로 인해 권력 관계가 뒤틀리지 않을까 하는 여러 불안감 때문에 사과를 꺼린다.
두 번째는 자신의 우월감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과를 일종의 패배나 굴복으로 받아들인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 또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자(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들이 대개 이러한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사과로 인해 접하게 될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피하고자 한다. 이에 라자르는 "(놀랍게도) 이들은 해를 끼친 행위 자체보다는 사과의 결과로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은 사과할 방법을 모르거나, 사과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종종 드라마에서 어느 재벌이 물질적 보상으로만 실수를 덮으려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는 감정적·심리적 교류를 통해 사과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한 탓이 크다.
이렇게 보면, 반대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들은 건강한 자아존중감을 갖춘 경우가 많다. 라자르는 "사과가 어렵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기꺼이 상호 인간적 교류의 상황에서 주도권을 공유하려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즐긴다"며 "이들은 자신의 단점과 결점을 인정하면서 지속적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사과의 언어학
사과란 가해자가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함으로써 양측이 관계를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가해자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덜고, 추후 보복의 가능성을 없애며, 관계 회복까지 도모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과할 때 주로 "사과합니다" "미안합니다" "유감입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언어학자 에드윈 L. 바티스텔라에 따르면, '미안'과 '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미안하다'는 화자의 내면 상태를 알려주는 형용사로써 단순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사과하다'는 잘못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동사로, 책임의 구체적인 행동까지 포함한다.
'유감'이라는 표현은 때로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나 외부 요소로 전가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잘못 사용할 시, 상대방에게 우월감을 내비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에 유감의 뜻을 표현할 때는 항상 그 일의 주체가 자신인지, 타인인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적 사과와 공적 사과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사적 사과에서는 피해자 측에서 가해자가 표현하는 반성이 진심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공적 사과에서도 진정성이 필요하지만, 이 경우는 가해 사실에 대한 공식 기록이 남기 때문에 '명예 회복'이 중점이 된다. 특히 국민 담화와 같은 자리에서의 사과는 정부와 시민 사이의 갈등을 풀어내고, 국가의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올바른 사과는 진정성을 필요로 한다
"책임의 시대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진정성 깃든 사과로 신뢰를 쌓아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한 여성 기자를 부를 때 '스위티(sweetie)'라는 다소 가벼운 표현을 써 논란이 불거졌다. 그는 즉시 해당 기자에게 연락해 구체적으로 사과했다. 같은 해 11월에도 낸시 레이건 영부인이 백악관에서 초혼식(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의식)을 행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언급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때도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2012년 미국 대선 유세에서 오바마는 공화당 상대 후보 미트 롬니에게 '사과 투어'라고 공격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 이미지가 그를 대통령에 앉히는 데 유효하게 작용했다. 이처럼 오바마의 사례는 진심 어린 사과가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과를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 일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대상을 판별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이후 자신의 잘못이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 미쳤는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다음은 언론학자 이현우가 정리한 '효과적인 사과문 작성에 필요한 원칙'이다.
1. 신속하게 사과하라
2. 본인이 직접 사과하라
3. 순도 100%로 사과하라
4 너무 짧거나 길게 하지 마라
5. 존 케이도의 5R 원칙에 따라 사과하라 (잘못에 대한 책임, 책임감의 인정, 양심의 가책 표현, 원상 복구를 위한 배상 제시, 재발 방지)
6. 사과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 줘라
- 언론학자 이현우(2015)
사과는 정직과 관대, 겸손과 헌신,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다
사실 사과의 긍정적 효과는 앞서 말한 '사과를 어려워하는 이유'에 반대로 설명할 수 있다. 일부 가해자는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만, 오히려 사과를 시도하는 자체가 피해자의 분노와 원한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할 때, 돌연 동정심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과는 그동안 느꼈던 모욕과 굴욕감을 치유하며, 복수심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또한 존엄성을 회복하고, 가해자와 공통된 가치를 공유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편, 가해자의 입장에서 사과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고, 지난 날의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리하여 양측의 관계는 다시금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사과는 급속한 변화를 겪는 이 행성에서 서로 기대고 살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사회적 치유책이다. 사과하는 개인이나 집단, 국가는 역사적으로 나약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행위로 여겨진다. 사과는 양측 모두 정직, 관대, 겸손, 헌신,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다" - 아론 라자르, <사과에 대하여>,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