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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닌 무릉도원을 걷고 있는 기분이 되는 길이 내 출근길에 있다. 그 길은 약 15년 전에 계획된 시가지를 만들면서 조성해놓은 키큰 가로수와 풀밭, 돌이 깔린 길인데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이다. 그 길에 들어서면 향긋한 풀내음이 풍기고 매미를 비롯한 풀벌레 소리가 들리며 가끔은 나비도 날아다닌다.

보건소 의사로서 일주일에 두 번씩 어린이집에 건강검진을 나가 아이들을 대하면 그 가로수와 풀밭길에서 느끼는 자연의 향긋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치과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나가 아이들을 검진하는데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호기심 어린 표정, 그리고 여자 아이가 앞에 선 남자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다정스럽게 올리고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내가 느낀 자연의 향긋함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의 심장은 1분에 90-100번을 뛰지만 '불안한 아이들'의 심장박동은 140-150번이었고 지레 겁을 내어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불안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은 대략 4-5% 정도였다.

그런 불안한 아이들의 가정환경이 어떤지 보육교사들에게 물어보면 대개가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부부싸움을 많이 하는지 어쩐지를 물어보면 그 점에 대해선 웃으면서 잘 모르겠다고 한다. 혹시 동생이 생겨 동생에 대한 질투로 괴로운 아이가 없는가 물어보니, 불안해 울었던 한 아이가 동생에 대해 말만 해도 싫어한다고 했다.

이런 불안한 아이들의 부모에게 이동식 정신의학박사가 쓴 '현대인의 정신건강', '현대인과 스트레스', '현대인과 노이로제'란 책을 사서 읽어보라는 말을 전해달라며, 보모에게 책이름을 써주고 보모도 그런 아이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이고 책을 읽어보라는 말을 해주었다.

어려서의 환경이 불안하여 자존심과 독립심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남에 대한 요구가 많고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방을 미워하는 적대적인 사람으로 변하지만 유능한 주부는 아이가 젖, 음식, 옷 등을 요구할 때 충분히 만족시켜줌으로써 믿음을 심어주어 아이가 불안해 하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잘 떨어지게 한다고 한다.

적개심 없이 반가움으로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손, 발, 온몸을 흔들어 퇴근길의 나를 반기던 내 아이의 5개월적 모습과 생명의 기쁨으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걷던 3살적 모습,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아이와 보냈던 시절이 보석처럼 내 가슴에서 빛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자라 현재 대학생인다.

학교에 이른 아침에 등교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그 아이가 요즘 내게 구두, 옷 등을 사달라고 한다. 남편의 구두, 옷 등을 사준 적이 없어 남편의 사이즈를 모르는데 아들의 구두, 와이셔츠, 바지 등을 사주면서는 치수를 외우게 되었다. 와이셔츠를 두 벌 사달라고 했는데 첫날은 잊어버렸다가 내게 화를 내는 아들을 보고 그 다음날 네 벌을 사다주었다.

아들이 집에 들어올 때 와이셔츠가 땀에 푹 젖은 것을 보고 날마다 셔츠를 갈아입어야겠는데 직장생활로 바쁜 내가 빨래를 제때에 맞춰 해주기도 힘들 것 같아 다림질이 필요없는 2벌을 여벌로 더 사들여 총 4벌을 샀던 것이다.

내 아들은 고등학교와 대학 초기엔 스스로 자신의 빨래를 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대학 고학년이 되어 사회진출을 준비하게 되면서 빨래를 비롯하여 자신의 옷, 구두 등을 사는 데 시간을 내는 것도 힘들게 되어 내가 도와주기로 작정했다.

나는 아이가 3살 때 찍힌 사진을 보고 행복한 기가 살아있는 얼굴 표정인데 머리 모양이 울퉁불퉁하게 밉게 이발이 된 것을 보고 반성했다. 이발소에 아이를 데려가지 않고 내가 아무렇게나 머리를 잘라주었던 것이다. 나의 아이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했던 것이 그 사진에 나타났던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내게 요구를 많이 하고 화를 내는 것을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이제라도 아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해주고자 대학생인 아들의 빨래를 해주고 구두, 옷 등을 즐거운 마음으로 사다준다. 와이셔츠를 4벌을 사다주자 아들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내가 이렇게 귀중한 정신의학적 지식과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도와준 정신과 의사인 내 남동생이 고마워 동생에게 돈 10만원을 상담비로 부치고 전화했더니 동생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유능한 주부는 식구를 부리는데도 식구들이 만족해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물어보니 자녀나 남편이 요구할 때 충분히 해주면 언제라도 엄마나 아내에게 요구하면 충분히 잘 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주부로부터 잘 떨어져나간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부를 쫓아다니며 여러가지 요구를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부로서 식구들에게 해줄 것을 충분히 해주어 믿음을 갖게 한 다음에 식구들에게 주부가 이것 저것 요구하면 식구들도 말을 들어주게 되어 주부가 식구들을 잘 부리는데도 식구들은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즈음 남편이 내게 세탁기 돌리는 법을 알려달라고 해 스스로 빨래를 하고 부엌에서 밥차릴 때 더 협조적이고 내가 지방에 놓아두고온 책, 물건 등을 주말에 서울에 올 때 가져다 달라고 하면 잘 가져다주면서도 예전보다 더 행복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나도 드디어 유능한 주부가 되는 첫 발을 내디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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