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본인이 수원화성을 방문한 것은 한 인터넷 서비스 사이트의 여행관련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촬영을 위한 헌팅을 갔을 때 성곽 곳곳에 스며 있는 선조들의 지혜에 많이 놀랐고 촬영을 하면서도 내내 그런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화성의 축성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화성의 매력은 더해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일까? 수원화성을 가면 그 뜻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말은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적어도 수원화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의미는 하나다. 바로 인류는 전쟁을 함에 있어서 필요성이 제기되는 기술과 문화의 발전을 통해 인간사의 발전과 진보를 거듭한다는 뜻이다.

과연 인류의 발전이 바로 그 전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라는 반문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전쟁을 통해 인간이 이루게 되는 발전의 양적인 부분이 엄청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수원화성은 97년 12월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당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다음과 같은 소견을 밝히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사건축물로 뛰어남'

바로 유네스코는 화성의, 아니 조선 국방분야의 과학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류 전체가 이룬 아주 중요한 어떤 진보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이런 놀라운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고대시대 전쟁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성곽임에도 불구하고 화성의 축성 배경과 동기에는 전쟁 그 자체의 필요성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그 화성 축성배경에 얽힌 아주 재미있는 조선왕조사의 한 드라마를 소개하고자 한다.

통상 화성의 축성 배경에는 축성자인 정조의 효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조는 우리가 너무 잘 알다시피 쌀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비참하게 죽어간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좀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의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에 있던 민가와 관청을 현 화성터인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화성의 축성 배경이 아비 사도세자에 대한 아들 정조의 효심때문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사도세자의 죽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신질환과 망나니 짓때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영조임금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첨예한 시절이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 당쟁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작 자신의 아들은 그 당쟁의 틈새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당시 집권당이라 할 수 있는 노론의 눈을 피해 사도세자는 소론과 은밀한 통교를 하고 소론의 행실을 보였다.

그는 나름대로 이런 행동을 통해 당시 집권당인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통해 왕권강화를 꿈꾸었는데 이를 그냥 두고 볼 노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사도세자는 평민복을 하고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밤에 몰래 돌아다니곤 했고, 예를 들면 몰래 소론과의 통교를 위해 평양까지 행차했는데 이를 노론은 몽유병으로 몰았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자는 몹쓸 인간으로 몰렸고 한평도 안되는 뒤주에 갇혀 죽어갔다.

사도세자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총명했고 야심도 있었다고 한다. 멀쩡한 세자를 그것도 아버지에 못지 않은 임금이 될 수 있는 이를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제거했던 것이다. 심지어 혜경궁 홍씨 즉 사도세자의 부인, 정조의 어머니마저 자신의 아버지가 노론이었고 자신의 친족이 유지하고 있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하기만 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소론을 택한 것은 영조 즉위에 배후세력이 된 노론이 영조시대에 정권을 잡았고 이로 인해 영조 재위동안 소론은 무참히 제거되어 나가는 등 그야말로 조선이 노론의 나라모양으로 되어가는 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반복되는 당쟁의 한 부분이다. 노론이 영조시대 정권을 잡은 것은 영조가 자신의 이복형인 경종의 갑작스러운 독살과 더불어 임금이 되는 과정에 노론이 이를 지지했기 때문이었고 이처럼 사도세자 또한 한 당과의 결탁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노론은 당연히 이에 대한 견제로 세자를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정조가 임금이 되고 취할 행동은 불을 보듯 빤한 것이었다. 다만 다행히도 연산군과 같은 피비린내나는 숙청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 차근 진행했던 것이다. 물론 즉위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노론 인물들을 사형시키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숙청을 단했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고 그는 개혁구상을 가지고 이를 하나씩 하나씩 실행시키는데 더욱 주력하였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그는 새로운 도읍을 통해 구세력의 터전인 한양이 아닌 새 도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신정치를 펼치려고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연루된 것은 노론의 시파나 벽파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벽파의 모함이었다. 당연히 화성 축성 과정에 벽파의 인재는 일체 발탁하지 않고 시파의 인재들로만 일을 진행시켰다.

바로 수원화성은 표면적으로는 정조의 선친에 대한 효심이 축성동기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정치를 펴려는 한 임금의 야심찬 계획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조선조 임금 그리고 세자들은 갑작스럽게 죽어간 경우가 많다. 아마 당쟁 속에서 타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바로 소현세자처럼 말이다. 정조는 수원성을 완성하고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정조가 죽자 벽파는 다시 정조가 신임한 시파를 철저하게 몰락시켰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벽파의 암살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조의 근본적인 계획, 수원화성 축성의 배경이 뚜렷해진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사에 적혀 있는 내용이 아니라 후세 사학자들이 정황 및 단편적인 사료들을 통해 추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나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이야기 되지 않는 내용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원화성 축성에는 전쟁 목적이라는 단순한 축성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임금과 권력을 잡으려는 당파간의 복잡한 파워게임과 개혁임금의 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조선조 내내 반복되었던 권력싸움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개혁임금이었던 만큼 정조에게 약간의 긍정적인 점수를 줄 수 있다.

수원화성을 직접 돌아보면 정조가 꿈꾼 이상사회가 눈에 보인다. 화성은 이전의 어떤 성보다 기능성을 강조한 구조로 축성되어 있으며 그러는 와중에도 미적인 부분을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실용적인 측면과 더불어 백성들에 대한 애정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화성을 돌다보면 그런 흔적을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연못 용연과, 전방관측과 동시에 수시로 병사들과 백성들이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연 앞의 방화수류정을 보면 정조가 꿈꾼 이상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간 정조지만 그가 아직도 후세에 사람들에게 다른 임금과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마 단순히 어떤 업적을 남겼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 했고 그 속에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하실 내용 :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1. 수원 화성에 관해 다루고 있는 개인 홈페이지들
http://my.dreamwiz.com/milunet/hwasung-main.htm
http://my.netian.com/~arch1/index.htm
2. 수원화성 문화제-일년에 한번 취뤄지는 능행차 재현 행사
http://suwontv.com/
3. 조선의 성곽 - 남한산성, 화성 등 조선시대 성곽에 대한 자세한 정보 제공
http://myhome2.naver.com/namguana/
4. 수원시청 - 수원의 문화 관광에 대한 안내
http://city.suwon.kyonggi.kr/03.html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yhome.shinbiro.com/~fhuco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