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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새로운 변신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이 총재는 얼마전의 전격 등원선언에 이어 추가 공적자금 동의, 한전 민영화법 동의, 세비동결 지시, 보안법 개폐 반대 등의 굵직한 현안들을 별도의 당론조정과정 없이 자신의 결정으로 당론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외양상 이 총재가 주요 현안들에 대한 결단을 내리며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같은 당론결정 방식에 대한 당내 비주류의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그만큼 이회창 체제가 안정기에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 이 총재는 정치지도자로서 여러 취약점을 지적받아 왔다.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념적 성향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정국운영에 있어서 맺고 끊는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한다거나, 폭이 좁은 인상을 주는 '협량(狹量)의 정치'에 갇혀 있다거나 하는 등의 비판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이 총재가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변신 시도는 자신의 취약점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동시에,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새로운 국민적 이미지를 심어나가려는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동안 여당과의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던 이 총재가 비로소 국민의 눈을 중시하는 대(對)국민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이 총재의 당운영방식에 대해 한나라당 내에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변신을 시도하려 노력하는 모습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실제로 무조건 국회등원, 추가 공적자금동의안 처리, 세비동결 지시 등의 결정에 대해서는 그 절차상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권을 상대로 이전투구식 싸움만 계속하고 있는 야당의 모습에 식상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총재가 보여준 최근의 결단들은 분명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이 총재는 적어도 국가적 위기 극복에 자신도 대국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총재의 변신 시도가 아직 다른 한편으로 공허함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이 총재의 변신이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변화가 아닌 이미지 변신을 추구하는데 머물러 있다는 한계에 기인한다.
당론을 선도해 나가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국가적 위기극복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민생현장을 누비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21세기 정치지도자의 필요조건은 되겠지만 충분조건은 결코 되지 못한다. 지난 시대의 양김은 그러한 이미지 정치만으로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이제 2천년대는 그 이상의 내용을 정치지도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한국 사회의 새로운 발전전략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 총재가 정작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 총재가 밝힌 국가보안법 개폐불가 입장은 지극히 실망스럽다. 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는 정치 사회적으로 찬반이 엇갈리고 있지만, 인권침해 우려가 큰 독소조항들에 대한 개정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도 별 무리없이 인정되는 분위기이다. 그럼에도 이 총재가 굳이 나서서 개정조차도 불가하다며, 보안법을 그야말로 성역화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의 '국가보안법 고수'와 김용갑 의원의 '조선노동당 2중대' 발언으로 진보진영의 지탄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
세간의 분석처럼, 이같은 결정이 이 총재 자신이 보수진영의 대표주자임을 확고히 하려는 포석이라면 더욱 의아하기만 하다. 정당이나 후보자가 이념적 좌우 구분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중도화를 통해 지지기반의 극대화를 노리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데, 이 총재가 굳이 보수진영의 방패막이로 나서 자신에 대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안법 개정불가 입장은 이 총재가 구시대의 유물을 수호하는 보수적 정치인이라는 인식만 초래하여 그에 대한 비토세력만을 광범하게 형성하는, 득(得)보다 실(失)이 큰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현집권세력에 비판적인 사람들 가운데 이 총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층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그러니까 '이회창 비토층'이 이미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이 총재 자신은 곰곰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야당 총재일 때도 이렇게 보수적인데 정권을 잡게 되면 얼마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겠는가"라는 우려를 갖고 있음을 이 총재는 직시하기 바란다.
보안법 개폐불가라는 이 총재의 입장표명은 나름대로 성과를 얻어가던 자신의 변신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겉으로는 '새로운 이회창'으로 변화하려는 것 같았지만, 정작 본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라는 실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적절한 수준에서의 보안법 개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굳이 보안법 개정불가를 내세워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혹여라도 보안법을 고치려는 쪽은 좌(左)이고, 보안법을 지키려는 쪽은 우(右)라는 낡은 편가르기 의식이 거기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겉모습만 바뀌면 무엇하겠는가.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반목과 대결의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낡은 사고와 이념이다. 그것을 가지고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총재의 변신 노력이 부디 낡은 보수의 틀을 뛰어넘어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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