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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뭍의 산천은 폭설이라는데 나는 지금 비오는 보길도의 시냇가를 걷고
있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도 계곡은 바짝 말라 허연 뱃살을 다 드러내 놓고 누워 있습니다.
왠만한 폭우가 아니면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
이 하천은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늘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입니다.

섬의 하천들은 대부분 태생적으로 건천일 수밖에 없지만 특이하게도
오래전 이 하천은 사철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섬이지만 보길도의 산세가 웅장하고 골이 깊은데다 산골짜기가 원시림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답던 이 계곡이 언제부턴가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산 유선도는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하여 낭음계라 불렀고, 섬 주민들은 뷘동 꼴창, 한동 꼴창이라 부르는 하천, 관청에서는부황천이라 부르는 이 하천이 건천이 된 것은 계곡의 상류인 부용리에 상수원 댐이 건설되고 난 뒤 부터입니다.

보길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화도 상업지구에 물을 대기 위해 군사정권이 강제로 댐을 막은지 십 수년.
댐이 생긴 이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부용리와 부황리 마을 주민들은 늘 농업 용수 부족으로 고통받아 왔고 심지어 집안의 샘이 마르는 일까지 자주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늘 말라 있어 물이 부족한 이 하천의 폭을 대대적으로 넓히는 공사가 추진되고 있어 말썽입니다.
전라남도에서는 50년만에 한번 있을지도 모를 대홍수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하천을 정비하겠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부황천 수해 상습지 개선 사업'.

늘 말라 있고 여름 장마 때도 비올 때만 잠깐 흐르다 마는 길이 2Km에 불과한 건천에 전라남도가 43억원의 거액을 들여 하천정비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는군요.
그것도 댐이 생긴 1988년 이후 단 한건의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도 없었던 하천이 '수해상습지'로 둔갑하여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몇몇 주민들의 민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천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홍수 때면 하천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제방을 튼튼히 해달라는 요청을 했었지요.
그 정도라면 불과 몇 억의 예산만 들여도 충분히 개선이 가능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남도는 연중 11개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을 수십억을 투입해 40M 폭으로 굳이 넓혀서 정비하겠다고 합니다.

수해 상습지가 됐든 아니든 수해의 위험이 있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나라살림도 어려운데 몇 억이면 가능한 사업을 몇 십억의 혈세를 낭비해 가며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천 정비 사업 계획이 알려지자 보상금 등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 현재 대다수의 주민들은 그 큰 돈을 들여 쓸데 없는 짓을 한다는 반응입니다.

적은 예산으로 현재 있는 하천의 지형을 살리면서 제방을 튼튼히 쌓으면 될텐데 왜 굳이 그렇게 폭을 넓히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라남도에 하천의 폭을 40m로 고집하는 이유지를 문의했더니, 하천법 27조에 하천정비 시행 계획은 하천 기본 계획의 범위 안에서 수립되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부황천 하천 정비 기본 계획'에 하천 폭을 40m로 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하천 기본 계획을 바꿔서 시행하면 될텐데 어찌된 일인지 그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입니다.

주민들로부터 기공 승낙서도 다 받지 않았고 사업이 확정되지 않아 아직 주민 여론을 수렴하고 있는 과정임에도 이미 완도의 한 건설업체가 낙찰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오늘 있었던 주민 공청회에서 완도군이 지역구인 도의원은 보길면장이 3억원의 예산을 신청했는데 자신이 수십억원을 따주었다고 자랑을 하며 주민들이 고마움을 몰라준다고 서운해 하더군요.
참 씁쓸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모하게 사업을 강행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전남도의 계획대로 부황천의 폭이 40M가 된다면 하천은 현재보다 거의 두배 이상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예산낭비도 큰 문제지만 또 하나 우려스러운 것은 하천 주변 생태계입니다.

부황리의 수십년 된 솔숲과 부용리의 수백년 된 동백나무들 수천 그루가 잘려나가고, 나뭇꾼과 선녀 전설이 깃든 삼형제 바위를 비롯한 계곡의 바위들이 파헤쳐질 것이 불을 보듯 확연합니다.

'부황천'이 말라붙은 계곡이지만 흉물스럽지 않고 마치 숲길처럼 아늑하기까지 한 것은 계곡 주변의 오래된 나무와 풀들, 바위들 덕분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잘리고 파헤쳐지게 되면 그 계곡은 죽음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전남도에서는 수십억을 쏟아부어 수백년된 동백나무와 소나무들을 잘라낸 자리에 미루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하고 있다더군요.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기가 막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 희망스러운 것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관리 사무소와 환경부에서 산림훼손과 생태계 파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비 속에서 천변의 동백나무와 소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수백 수천년의 폭풍우와 큰 태풍에도 끄떡없던 저 계곡의 나무들이 내년 겨울까지 무사할 수 있을지.
나는 또 물 없는 물 속을 철퍽이며 무겁게 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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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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