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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O란 “La Feria Internacional de Arte Contemporaneo”의 준말로서 “국제 현대미술 박람회”로 번역할 수 있다. 세계 미술조류의 혼류뿐 아니라 실제 작품에 대한 거래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전시회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공식적인 영어명칭은 “The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Fair”이며 올해로 20주년을 맞게 된다.

이번 전시회(2.1-2.22)에는 세계 각국의 271개 갤러리가 참여하였고 106명의 스페인 작가와 165명의 외국 작가가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백남준 씨가 유일하게 참여해서 1997년 작인 “라디오 멘”을 전시하였다. 마드리드 시장인 Alberto Ruiz-Gallardon은 인사말에서 이 박람회를 통해 “사상과 느낌의 흐름과 리얼리티 개념의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림의 전시와 더불어 “영국의 동시대 미술”, ““미술작품 수집의 기술” 등 다양한 주제의 분임토의가 세미나실에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1997년 광주 비엔날레를 감독한 이영철 씨가 “작가와 큐레이터”라는 주제의 토의에 참석한 것이 눈에 띄었다.

5번관에 들어섰을 때 입구를 마주하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갤러리는 뉴욕, 도쿄, 마드리드 등에 갤러리를 갖고 있는 말보로 갤러리였다. 말보로 갤러리는 빌 제클린 같은 중요한 현대작가들을 적극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Pablo Genoves의 Mark XIII이라는 작품이었다. 녹아흐르는 사진기를 들고 있는 빨간 메니큐어를 바른 손을 그린 것인데 손 역시 녹아 흐르고 있었다. 수채화에 물이 번져 흐르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는데 사진기와 녹아 흐르는 빨간 메니큐어가 상징하는 것은 사진으로 찍히는 재현의 이미지에 대한 반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재현에 대한 반감은 이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두고 푸코가 지적한 바 있다. 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보여주는 재현과 현실의 괴리는 재현한 것(그림의 파이프)과 그 원본(실제 파이프)이 같은 것이 아니며 별개의 평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두개의 다른 것에 위계를 새워놓고 "그림의 파이프"를 보고 "실제 파이프"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연관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은 “smile”이라는 부제가 붙은 어느 작가의 연작 중 하나로 어떤 이가 시가를 피우면서 말풍선 속에 예의 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그 파이프 그림을 넣은 것이다(후후. 정말 파이프가 아니다!). 작가의 기발한 유머를 엿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작가의 연작중에는 도너츠를 가르키고 있는 ET, 쿠기가 박힌 뇌 앞에 서있는 사람 등 그저 웃고 넘기기에 힘든 작품들이 많았다.

이처럼 유머가 현대미술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이번 전시회에서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Spancer Tunick의 작품사진에서는 라이플 총을 든 사냥꾼의 벽화앞에 누드로 선 남자가 서 있다. 사진 속의 그 남자는 벽화속의 사냥꾼을 불안하고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한컷의 재치로 백마디의 동물수렵금지 논리보다 더 많은 말을 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직접적인 메시지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여서, 어떤 작가의 사진에서는 등에 “real life”라고 문신을 새긴 누드의 남자가 숲과 풀에 없어져 있었는데 실소를 자아낼 뿐이었다. 마치 아이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 그보다는 차라리 풀에 엎어져 있는 인형의 상반신을 찍은 Renwick Heronimo의 사진이 더 메시지에 충실하다. 아무튼 이런 류의 작품으로는 어느 스페인 작가가 만든 빨간 양탄자에 금색으로 칠한 알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는데 졸부들이나 사가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현대작가의 작품들은 상당한 수가 예술혼을 담기보다는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술혼은 고사하고 번뜩이는 직감도 갖지못하고 소재도 평범한 작품들 역시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하긴 모든 예술가가 위대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작가들은 오히려 눈에 띌 정도였는데 이들 중에는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다는 것도 특이했다. 그들 중에는 과거의 유명화가들 스타일을 좋게 말하면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솔직히 말하면 모사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Adriana Schmidt라는 작가처럼 뭉크의 유명한 “절규”를 멋지게 재해석해낸 경우나 Alex Frost처럼 가우디의 건축이라고 착각할 만한 한 조각을 다룬 경우도 있었으며 또 일본작가인 Hiroyuki Matsukage처럼 고야의 마야부인의 포즈 그대로 흉내낸, 하지만 가슴과 하반신 부분만 가려 “옷입은”도 아니고 “옷벗은”도 아닌 포즈의 모델을 사진으로 찍은 작가도 있어서 신선했다.

일본인들은 이번 전시회에서도 많은 작품을 내놓고 있었는데 스스로 일본인을 표현한 것도 있었지만 외국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주자로 일본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은근히 질투가 났다. 스모를 대상으로 삼은 그림이나 미국산 리바이스 청바지 위 허리에 새겨진 일본여인 문신사진, 일본의 만화케렉터 등 일본은 이미 아시아를 대표한 세계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되어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미술”박람회”는 미술계 뿐 아니라 사회전반의 유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도 한창 주목받고 있는 중남미의 혁명가인 체게베라를 오브제로 한 작가도 두명 있었다.

한 여성작가는 예의 그 유명한 체게바라의 빨간과 검은 색의 몽타쥐를 여성으로 바꾸어놓았는데 여성해방을 위한 게릴라 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것은 일본인의 것으로 단팥과 그 진액으로 체게바라의 그림을 그대로 표시한 것인데 이 경우 정말 아쉬웠던 것은 차라리 단팥이라는 소재 말고 중남미 산으로 유명한, 경작자들이 이익에서 배제된, 커피알갱이를 사용했더라면 단순 아이디어가 아닌 체게바라의 시의성까지 함축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소재 얘기를 더 하자면 콜라지들의 다양한 소재나 색을 입힌 철망들이 특이했다. 또한 오브제로 쓰인 것들도 다양해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오브제로 쓰고 있었는데 어른의 키만한 커다란 숫가락을 두개 붙여놓은 작품도 있었고 우묵한 사기그릇들을 모아 공중에 매달아 놓은 작품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개인적으로 해석불가능인데 “잘먹고 잘사는 게 중요하다는 건가? “라면서 웃고 넘어갔다.

“과거 미술에서는 무식한 대중이 작가를 괴롭혔는데 현대미술은 작가가 대중을 괴롭힌다”는 말처럼 현대미술은 엥포르말 같은, 해체를 통한 “낯설게 하기”가 그 주요특징인 듯하다. 이는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현대철학사조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이성에 의지한 결과가 “환경파괴”, “빈부격차심화” 밖에 더 있냐는 60년대 히피들의 주장이 진지한 철학의 장으로 들어와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해체가 주는 미학은 어떤 것일까? 한 작가는 작품으로 두가지 판넬을 세웠는데 하나는 유리창 문을 밖에서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전신사진이고 그 뒤의 판넬은 뿌연 불투명 유리를 통해 찍힌 흐릿한 그 사람의 뒷모습 사진이다. 해체를 통해 사회를 볼 수 있다면 그 불투명 유리를 통한 흐릿한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조잡한 소재를 사용한 작품이지만 인상적인 것으로 축음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었다. 축음기의 단면에는 여러 전기선대신 사람의 세포와 모세혈관을 실과 전구 등을 동원해서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건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금방 동의하는 작품이다. 독일에서 피아노 연주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가 “연주할 때 일이백 년전 작곡가들과 대화하는 느낌이 너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처럼 예술가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 신체 자체를 오브제로 한 것 중에는 Enric Mauri의 작품으로 혓바닥을 길게 뺀 사진이 있었는데 그 혓바닥이 과장되어 가슴까지 내려오는 것이 섬뜩했다. Veronika Bromova의 작품 역시 혓바닥을 늘어뜨린 사진인데 혓바닥에 실핏줄과 돌기들이 마치 살갗을 한꺼풀벗긴 사람의 피부내부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혀가 인간의 외향적인 존재증명이라면 배꼽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증명이 될 것이다. Cesar Martinez의 작품으로 두 팔을 마치 폼페이의 석회인처럼 두팔로 가슴을 감싸앉고 눈을 감고 하늘을 보는 조각이 있었는데 배꼽부터 탯줄이 박혀서 땅에 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한 Cornelius Volker의 그림에서는 팔짱을 낀 사람의 가슴부터 배꼽까지 부분만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Hans Moser는 “나는 와인을 그냥 마시지 않는다. 나는 또한 와인이 나를 깨물게 한다”고 했는데 와인과 그를 마시는 사람의 관계처럼 인간의 육체와 그를 대상으로 한 예술작품의 관계 또한 그러하였다. 기형도의 시들이 그렇듯 마치 투시거울을 보는듯한 느낌이 자아내는 슬픔은 각별하다.

슬픔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는 보는 각도에 따라 “you loose!”라고 외치는 상대방을 볼 수 있었던 설치미술, 움직이는 로봇팔 끝에 달린 초소형카메라에 잡혀 흰 벽에 영사되는 관람객들, 고개를 숙여 얼굴이 자리잡을 부분에 달이 떠 있고 올린 팔에는 구름이 잡혀있던 그림, 빨간 글씨로 아무렇게나 휘갈긴 “나의 팩스기계가 불타고 있다”라는 작품들을 꼽을 수 있었다.

사람에게 오감이 있다? 이번 전시회는 시각 뿐 아니라 청각, 촉각을 동원해야 하는 작품도 몇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개인적으로는 결국 육감인 inspiration을 위한 것인 듯했다. 하긴 어느 예술 장르가 그렇지 않으랴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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