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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부터 1999년 3월까지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키부츠에서 생활한 이야기들을 <샬롬! 이스라엘>을 통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일단, 오랜만에 <샬롬! 이스라엘>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나름대로 저의 기사를 열심히 봐주셨던 독자들께는 죄송합니다. 매일매일 넘치는 다른 기사 때문에 한동안 뜸했습니다.)
나의 이스라엘 생활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초기 5개월의 키부츠 생활. 그리고 친구 C와 자취를 하면서 드루즈족 아랍 친구인 솔리만 집에서 호위호식(?)했던 생활, 그리고 나타냐라는 지중해 지역에서 쌍둥이 아이를 돌보며 여행경비를 벌었던 한 달간의 생활로.
솔리만의 집에서 거처하는 동안은 사실 하숙비도 안 내고 남의 집에서 하숙을 한 셈이다. 솔리만이라는 좋은 친구 덕이다. 이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이스라엘에서의 백수생활이 시작된 셈이다. 가끔씩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해 눈이 내리지 않는 관계로 스키장이 열리지 않아 호텔에는 더 이상 일이 없었고, 그 후로는 매일 아침 11시나 12시쯤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책을 읽으며 T.V를 보고 밤에는 술을 먹으면서 친구 C와 현재를 한탄하는 생활이 두 달 정도 계속되었다.
가끔씩 키부츠 호텔에 몰래 잠입해 수영을 하거나 사우나를 하는 얌체짓을 하기도 했다. 목욕탕이 없는 이스라엘에서 목욕탕에 갈 때 가져가는 준비물에 수영복을 넣어서, 수영을 하고 사우나를 한 후 때를 박박 밀면서 한국의 목욕탕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C와 나는 정기적으로 화요일과 목요일에 열리는 크파 길라디 시골장에 나가 감자와 과일, 과자 등을 샀다. 장에 나오는 장사꾼들은 대부분 아랍인들이다. 그들의 눈에 C와 나는 '신기한 동양여자'였고, 그들은 우리에게 가격을 깎아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간혹 안 깎아주는 경우에는 깎아줄 때까지 가지 않고 기다렸다. 의지의 한국인.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가져간 옷은 너무나 얇았다. 밖을 외출할 때는 키부츠에서 주워온 단추 다 떨어진 바바리를 입고 나갔다. 알고 봤더니 그 바바리는 'Made in Korea'였다. 제 짝 만났지..
돈은 점점 다 떨어져가고 이대로 나태한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어 C와 나는 경제의 중심지인 텔아비브로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C는 갓난아기와 다섯 살 짜리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고, 나는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쌍둥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한달 월급은 $650. C와 나는 그렇게 헤어져서 꼭 한 달간 외화획득을 한 후 이집트로 여행을 갔다. K라는 C의 후배를 이스라엘에서 우연히 만나 이집트로는 한 번 더 여행을 갔다.
비자만기라는 이유로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바로 영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C와 K는 영국에서 나와 함께 4일을 머무른 뒤 한국으로 가버렸고, 나는 런던을 며칠 더 둘러본 후 네덜란드로 갔다. 네덜란드에서 4주를 지내면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꼭 가고 싶었던 '고흐박물관'은 운이 나쁘게도 그 당시 때아닌 '공사중'이었고, 다행히 로틀담을 찾아온 '피카소'는 만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올렸던 글이 키부츠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한 동안 뜸했었던 <샬롬! 이스라엘>은 우선 솔리만 이야기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솔리만은 정말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고,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독자들에게 솔리만 이야기는 어느 정도 팔레스타인 갈증을 풀어줄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곳이 팔레스타인지역이 아니라서 그 쪽의 정치 사회 이야기를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아랍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아랍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솔리만의 이야기 후로는 이스라엘 쌍둥이를 한달 간 키워본 이야기들과 이집트 여행이야기 등으로 연재를 계속할 예정이다.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관심있게 <샬롬! 이스라엘>을 읽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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