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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방송의 저녁뉴스 시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맨의 머리에는 미키마우스 모자가 씌워져 있다.'

몇 년 전 디즈니가 ABC 방송을 인수하자, 이 소식을 다룬 <뉴스위크>에 등장한 풍자만화다. 뉴스위크는 ABC 뉴스의 진행자들이 모기업인 디즈니에 관련된 소식을 전할 때 과연 공정한 보도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었다.

요즘 ABC 방송을 보면 너무 앞서간 것 아닌가 생각했던 당시 뉴스위크의 기사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관찰이다.

ABC의 토크쇼 진행자 로지 오도넬이 디즈니랜드를 배경으로 매주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한다거나 디즈니 계열사에서 제작한 영화로 주말 공세를 하는 것은 시청자 입장에서 좋게 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의 여름 흥행대작 <진주만>이 개봉되던 주에 ABC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미디어 기업의 시너지 효과라고 좋게만 봐 주기에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것 같다.

뉴스 시간마다 <진주만> 소식이 꼭 빠지지 않더니 하와이의 항공모함에서 열린 500만달러짜리 시사회에 ABC 뉴스의 기자까지 특파되어 생방송 리포트를 하는 데 이르면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사실 불길한 조짐은 지난 해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대작 <다이너소어>의 개봉을 전후로 ABC 뉴스는 이미 뉴스와 자사 홍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허물고 있었던 것.

하지만 연예가 소식 중계도 아닌 주요 뉴스시간에 ABC가 이렇게 모회사의 흥행상품을 대놓고 광고할 정도로 뻔뻔하게 나올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해 디즈니랜드에 개장한 캘리포니아 테마파크에 대한 소식이 ABC뉴스에 잇달아 등장하면서 본격화된 자사 홍보성 뉴스는 <진주만> 개봉으로 그 정점에 이른 느낌이다

공정보도는 미국에서도 뉴스 프로그램의 신뢰도를 가름하는 핵심 요소. 제 3자에 대한 보도라도 조금이나마 편향된 시각을 보인다 싶으면 비판을 받게 마련인데 하물며 모회사나 계열사에 관련된 내용을 주요 뉴스로 취급하는 것은 업계의 금기를 대놓고 무시하는 오만한 행동이다.

미디어 업계의 합종연횡이 계속되면서 미국에서도 공정보도를 생명으로 삼는 언론의 중립성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미묘한 긴장관계를 감안해 타임워너 계열사인 <포천>지 같은 경우는 모회사인 타임워너와 AOL의 합병 건을 보도할 때면 반드시 포천은 타임워너의 계열사임을 기사에 명시한다.

디즈니와 ABC의 합병 사실을 보도했던 뉴스위크의 기자도 <뉴스위크>의 모회사가 <워싱턴포스트>임을 본문에서 밝혀 기사가 비판한 함정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방어막을 치기도 했다.

계열사 보도 원칙에 대한 논란이 아직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지 않은 미국에 비해 최근 몇 년간 다국적 미디어 기업에 의한 토종 언론사의 인수 합병이 활발했던 영국에서는 심각한 대립으로 발전한 사례도 있었다.

전통 일간지 <더 타임스>가 모기업 <뉴스코프>와 관련된 쟁점을 과감히 보도했는데 모기업의 경영진이 편집부에 압력을 가해 보도 중단을 요청했던 것. 이에 <더 타임스> 편집진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반발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바 있다.

경영과 편집이 자웅동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의 거대 언론기업들에게 자사 보도에 대한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터무니 없는 것일까? 양사 공히 마라톤 대회를 운영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 마라톤을 전후로 한 자사 홍보성 기사는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스포츠 면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면과 1면까지 동원해 온갖 사소한 이야기거리까지 '기사'로 만들어낸다.

방송 역시 마찬가지. 자사의 인기 드라마나 대형 이벤트를 주요 뉴스로 취급해 보도하는 행태는 이제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버린 느낌이다.

신문지면과 방송전파의 뉴스는 언론사가 독자와 시청자에게 제공하는 공공재이다. 자사 홍보성 보도는 뉴스와 기사만큼은 자사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전해야 한다는 양자간의 암묵적 약속을 가볍게 깨버리는 언론사의 만행이다.

조선과 동아가 마라톤 대회를 연다면, <社告(사고)>란을 통해 명백하게 자사 홍보임을 독자에게 알려야 할 것이고 방송사 역시 자사가 주최하는 행사는 뉴스 시간이 아니라 별도의 광고를 통해 홍보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뉴스의 옷을 입힌 자사홍보는 독자와 시청자에 대한 사기행각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긴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전 지면을 총동원해 자사 이기주의 관철을 위한 보도행태를 보이고 있는 조.중.동에게는 이런 기대조차 사치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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