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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드디어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언니'와 한 시내나들이 약속을 지켰다. 삼주 전쯤 룸메이트와 함께 외출했다가 엘리베이터 가동이 멈춘 새벽 1시가 넘어 귀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올해 19살인 그 산동아가씨가 귀찮은 내색 한번 안하고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켜 주었다.

집이 20층 꼭대기인지라 여간해서 '모진 맘'을 먹지 않으면 그 밤에 걸어서 20층까지 올라갈 엄두를 못내기 때문에 바로 옆동의 그 아가씨 숙소를 찾아가 염치없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와 룸메이트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그 아가씨에게 언제 함께 저녁을 먹자는둥 같이 놀러를 가자는둥하며 온갖 '입에 발린' 약속을 해놓았던 터였다. 그러나 뭐가 그리도 바쁜지 말꺼내 놓은지 한참이 지나도록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내심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그 아가씨 근무시간이 오후 3시까지로 조정되었다는 얘길 듣고 우리들은 토요일날 오후에 함께 왕푸징을 가기로 '날'을 잡았다.

올 2월에 처음 베이징에 왔다는 그 아가씨는 그 동안 베이징에서 놀러가본 곳이라고는 이허위안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무시간이 수시로 바뀌는 통에 시내구경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룸메이트는 이 아가씨를 어디로 '모셔야' 할지 상의하다가 가장 만만하고 무난한 왕푸징으로 결정을 했다. 함께 왕푸징을 돌아보고 시간이 남으면 근처의 톈안먼광장까지 갔다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돌아오자는 계획이었다.


밤이 더 흥겨운 왕푸징거리

다른 곳에 먼저 볼일이 있는 룸메이트와 왕푸징서점 앞에서 오후 5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내가 그 아가씨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함께 가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 아가씨 숙소로 가서 벨을 누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얼른 문을 열어준다. 옷갈아입고 나온다고 조금만 기다리란다.

하얀 상의에 까만 긴바지, 그리고 며칠 전 종합시장에서 새로 샀다는 샌들을 신고 단정한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나온다. 얼굴 가득 싱글벙글이다. 무척이나 기쁜가보다. 나도 덩달아 '놀러가는' 기분이 좋아진다.

1시간여 버스를 타고 왕푸징에 내리니 5시가 다 되어간다. 얼마 전 베이징에 내린 단비로 거리가 아직도 촉촉하게 젖어 있다. 비가 내린 후 날도 후덥지근하지 않고 초가을처럼 선선한 것이 '놀기에' 딱 좋은 날씨다.

초저녁, 왕푸징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되고 있다. 왕푸징은 낮보다는 밤이 더 아름다운 거리이다. 보행자 거리여서 대로 가득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제 막 '밤장사'를 준비하는 노천카페들과 골목골목에서 '야시'를 차리는 천막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각종 올림픽 조형물들도 들어서고 공중낙하 놀이기구들도 들어서서 거리가 한결 명랑해진 것 같다.

왕푸징은 베이징 제일의 번화가이자 중심지이다. 베이징에서 가장 긴 거리인 창안지에를 끼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는 베이징의 '금싸라기 땅'인 금융가와 톈안먼광장, 치엔먼 등이 줄줄이 연달아 있다. 그리고 바로 옆골목으로 똥딴시장이 있고 치엔멘의 따쨔란, 홍치아오시장등 유명시장들이 가까워서 쇼핑의 중심이기도 하다.

▲왕푸징의 '먹자골록'안 ⓒ 박현숙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왕푸징의 매력은 역시 '먹자골목'이다. 중국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왕푸징에 있는 먹자골목을 들어서면 그 다양한 중국요리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리고 발디딜 틈 없이 촘촘하게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먹자골목안에서 '악악' 소리를 질러대며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왕푸징서점 앞에서 룸메이트를 만나 셋이서 함께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이미 거리구경은 했고, 마땅히 어디를 들어갈 데가 생각나지 않아 그녀에게 더 '눈요기'를 시켜줄 겸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먹자골목으로 갔다.

초저녁인데도 왕푸징의 '샤오츠지에'(먹자골목)는 그야말로 발디딜틈이 없다. 입구에서부터 각종 꼬치를 손에 들고 먹고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길거리 한가운데에 한상 가득 차려놓고 푸짐한 이른 저녁을 먹는 사람들, '병아리' 꼬치구이를 두 손 가득 들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꼬치구이'라며 호객을 하는 음식점 점원 등.

▲병아리 꼬치 ⓒ 박현숙
그날은 유난히 병아리 꼬치구이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 병아리꼬치라는 건 채 부화가 덜 된 새끼병아리를 구워서 꼬치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나와 룸메이트는 보기만 해도 '치를 떤다'.

재래시장 등에서 그 부화가 덜 된 새끼병아리의 머리만 구워서 파는 것도 많이 봤지만, 한번도 그걸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둘다 '비위'가 약해서인지, 아님 아직 중국요리에 대한 단련이 덜 되어서인지 도저히 '이상한 동물'요리는 먹을 엄두가 안난다.

한번은 중국친구들과 중국식당에 가서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오늘은 아주 맛있는 요리를 먹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요리가 다 나오고 그 '맛있는'요리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좀체로 알려주지를 않는 게다. 생긴 건 닭고기 요리같기도 한데 '분위기'는 그런 것 같지 않아서 자꾸 물어보니 '일단 먼저 먹어보라'고 한다.

뭔가 이상한 동물일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끝까지 안먹고 버티자 드디어 그 요리이름을 알려준다. 청개구리 요리란다. 순간, 정말 안먹길 잘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청개구리 정도가 뭐 그리 끔찍하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도 '쥐약'이다.

우리 엘리베이터 아가씨는 그 병아리꼬치구이가 아주 맛있다고 같이 먹어보자고 꼬시는 것이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녀의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그녀에게 왕푸징의 병아리꼬치구이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버렸지만, 그녀는 내내 그 맛있는 걸 왜 못먹냐고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른닭'이나 '새끼닭'이나 다 같은 '닭고기'라나. 옆에 있던 룸메이트가 '씨익' 웃으며 하는 말. "그래도 징그럽잖아!"

날이 어두워지고 골목에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왕푸징의 밤'이 시작되는데, 이 때는 먹자골목의 분위기도 갈수록 흥겨워진다.

밤이 되면, 이 골목에서 양꼬치구이를 파는 우루무치 아저씨(얼굴이 신장사람들과 비슷해서 우리가 그냥 추측한 것이다)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손놀림과 동작도 더 재미있어진다. 그 우루무치아저씨 가게 앞에서 조금만 서성거렸다간 곧바로 손에 '양꼬치'가 쥐여지기 쉽상이다.

안먹는다고 거절을 할려고 해도 쌍꺼풀진 눈으로 '농염하게' 웃어가면서,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걸 안먹으면 어떡하냐'며 얼마나 능글늘글하게 꼬셔대는지, 그 '꼬시는' 정성에 그만 감동해서라도 양꼬치를 입에 물게 된다.

돌아설 때 '짜이젠'(잘가)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흔드는 그 아저씨는 아가씨들에게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내 룸메이트는 '너무 느끼하다'며 몸을 부르르 떨지만, 나는 그 아저씨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갈 때마다 매번 그 앞을 서성거리게 된다.

사실, 왕푸징을 갈 때마다 그 먹자골목에서 뭘 제대로 먹어본 적은 한번도 없다. 기껏해야 몇 가지 꼬치구이 정도를 걸어다니면서 먹어본 것 외에는, 그냥 재미삼아 눈요기만 하다가 돌아오곤 한다. 뭘 먹어야 맛있는지 잘 모르는 탓도 있지만, 그 먹자골목은 보는 재미가 먹는 재미보다 훨씬 더 '맛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중국인의 땅' 텐안먼광장

▲톈안먼 광장의 '연'날리기 ⓒ 박현숙
왕푸징 골목을 나와 오른쪽으로 20분여를 걸어가면 곧바로 톈안먼 광장으로 이어진다. 톈안먼 광장이야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부연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광장 맞은편으로는 자금성으로 유명한 고궁이 있고, 광장 양옆으로는 인민대회당과 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이곳에 오면 비로소 '정치적인' 베이징의 냄새가 나고, 톈안먼 정면에 붙은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의 사진위로 '역사적인' 장면들이 하나둘 겹쳐져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저녁놀이 어슴푸레하게 덮이고 있는 그날 톈안먼광장은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시골에서 관광온 촌사람들로 한가해서 그저 평범한 인민들의 공원 같다.

광장한복판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우리들을 불러세우더니 '저쪽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무슨 일인지 구경가자고 한다. 진짜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꽉들어차 있다. 무슨 좋은 구경거리가 났나 싶어 우리들도 그쪽으로 달려간다.

▲톈안먼 광장에서 국기하강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 박현숙
좋은 구경거리임에는 틀림없다. 뭔가 했더니 7시 45분에 있는 국기하강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1시간 정도가 더 남았는데도 국기가 걸려 있는 주변으로 벌써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그리고 TV로만 보던 장면을 직접 보게 되었다며 엘리베이터 언니가 너무 좋아한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제법 앞자리축에 드는 곳에 신문지를 깔고 나란히 앉았다. 옆에는 프랑스인들로 보이는 젊은애들 네 명이 역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데 그 폼이 꽤나 오랫동안 기다린 눈치다. 지루한지 넷이서 무슨 게임인가를 하며 킥킥대고 있다.

나처럼 성질 급하고 다혈질인 한국인에게 1시간이 넘는 기다림이란 지루함을 떠나 그 자체가 고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겨울, 새벽 4시부터 국기게양식 장면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와서 무려 세 시간여를 추위에 떨며 기다린 경험이 있었던 터라 더 이상 새로운 호기심도 없었다. 그녀의 눈치를 슬쩍보며 "기다렸다 보고 가고 싶어?"라고 묻자 그녀는 '꼭 보고 가야 된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래. 오늘은 어차피 그녀를 위한 나들이니까.

기다리는 관중들도 가지각색이다. 대부분은 다 가까운 시골이나 베이징에 관광을 하러온 사람들인 것 같다. 손자들로 보이는 아이들을 안고 잘 거동을 못하는 불편한 다리로 내내 땅바닥에 불편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연로한 할머니의 모습도 있다. 7시부터 미리 나와서 국기대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보초들이 그 할머니와 손자들을 특별히 앞으로 모신다. 주위사람들에게도 그 할머니가 편하게 앉을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하라고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있는 이 국기게양식과 하강식은 톈안먼광장의 중요한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하강식보다는 아침 게양식이 더 멋있는데, 국기를 든 사열대들이 톈안먼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주변이 술렁거리다가 점점 광장쪽으로 가까워지면서 분위기가 매우 엄숙해진다.

지난 99년 10월 1일, 건국 50주년 기념식때도 이 톈안먼광장의 국기게양식 장면은 아주 유명했다. 게양식의 하이라이트는, 게양 바로 직전 오성홍기 끝을 한번 쥐었다가 순간 '쫘악'하고 팔과 몸을 공중으로 뻗쳐 오성홍기를 나부끼는 바로 그 장면이다. 그 장면을 보면 중국인이 아닌 나도 순간적으로 전율이 느껴진다. 앞에 옆에 있는 중국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숙연함과 감동 그 자체로 가슴에 손을 얹고 비장한 표정으로 국가를 합창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엉뚱하게도, 아주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아침저녁으로 공개적으로 했던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 장면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들 일제히 멈춰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생각이 나는데, 지금 중국사람들의 표정과 비교를 하면 그 비장함(?)이 조금 덜했던 것 같다. 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노래를 부른 적은 없다. 애국심이 부족해서였을까.

국기와 국가라는 상징이 사람들을 묶어내는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생각하면 뭐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중요한 행사나 스포츠경기, 이국에서 나부끼는 자국의 국기 등을 대할 때면 확실히 나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뚜렷하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소속감과 정체성이 과장스럽게 또는 지나친 감정으로 팽창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그 위험스러운 파국 역시 우려되는 상황이기는 하다.

사열대를 기다리는 저 많은 중국인들은 어떠한 정체성과 소속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일까. 광장 안에 있는 이 사람들중에는, 오성홍기 안에 그려져있는 다섯 개의 별들이 상징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 소수민족 그리고 공산당원들도 있을 것이다.

그 붉은 바탕이 상징한다는 그들 인민 모두의 피로 만들어진 신중국 그리고 이 신중국인들은 제발 그들의 말처럼 영원히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기를 바란다. 부디 주변국 사람들이 걱정하는 중화민족의 부활이나 팽창을 꿈꾸는 파괴적 민족주의의 모습이 아니길.

▲중국 오성홍기 하강모습 ⓒ 박현숙
드디어 톈안먼쪽에서 사열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다 일어선다. 사람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초들의 눈빛도 순간 더 번쩍이는 것 같다. 사열대원들이 광장 중심으로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의 소란스러움도 잦아든다.

하강식은 게양식에 비해 다소 그 전율이 약하다. 배경음악도 없어서인지 가슴에 손을 얹는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천천히 오성홍기가 내려오는 장면과 사열대원들의 짧은 사열장면이 볼거리의 전부다. 한 시간여를 기다린 것에 비해 약 10분동안 치러지는 행사는 너무 허무하게 끝난다.

톈안먼 광장안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광장 안도 썰렁해진다. 하늘높이 떠있던 연들도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제야 진짜 밤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왕푸징거리의 올림픽 조형물 전시 ⓒ 박현숙
얼마 전 톈안먼 광장에는 모 음료수 대기업의 플래카드가 걸린 적이 있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상업광고를 철저히 금하는 톈안먼의 규칙상 어떠한 형태의 상업광고도 곧바로 철퇴를 맞는다.

지난 건국 50주년 기념일 때에도 톈안먼 광장과 챵안지에 거리에 300여 개 이상의 광고물들이 이 광장에 몰래 '깃발'을 꽂으려고 시도했다고 하는데, 곧바로 철거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아직까지 중국에서 톈안먼광장 만큼은 자본의 침탈로부터 지켜내고 싶은 사회주의의 철옹성'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매년 자본은 이 톈안먼을 점령하고 싶어한다. 그 자본의 물리력앞에 톈안먼은 과연 언제까지 '영원한 중국인의 땅'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언니의 표정은 여전히 즐거워 보인다. 이제 맛있는 저녁만 먹으면 오늘 우리들의 나들이는 그럭저럭 행복한 시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와 룸메이트야 왕푸징이건 톈안먼이건 솔직이 지겹기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첫 시내구경이라 뭐든지 신선하다는 눈빛이다. 우리둘은 마치 토박이 베이징인이라도 된 냥 어깨가 으쓱해진다.

젊은 처녀와 늙은 언니들의 저녁식사

집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또 비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다. 버스를 타기 위해 치엔먼까지 가는 도중에, 제법 옷을 적실 정도로 빗발이 굵어진다. 눈치 빠른 룸메이트가 마지막 봉사정신을 발휘하려는지 '택시는 내가 쏜다'고 선언을 한다. 엘리베이터 아가씨는 미안한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고 '좋아좋아'를 외치며 내가 그녀의 등을 택시 안으로 밀어넣는다.

집근처의 음식 잘하는 중국식당으로 가서 '만찬'을 시키고 함께 시원한 맥주도 주문한다. 그녀에게 부담갖지 말고 먹고 싶은 요리를 시키라고 계속 권했는데도 그녀는 결국 집에서 흔하게 해먹을 수 있는 싸구려 요리를 시키고 만다. 또 눈치빠른 나의 룸메이트가 이것저것 맛있는 요리들을 더 주문한다.

술을 못할 줄 알았던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술을 좀 할 줄 안다. 맥주 한잔을 다 마시고도 또 한잔을 더 받는 폼이 예전에 마셔본 가락이 있다. 술을 안좋아하는 룸메이트도 그날 따라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빨개지도록 홀짝홀짝 잘도 마신다.

그녀에게 오늘 나들이 즐거웠냐는 뻔한 질문을 하는 한편으로 베이징 생활이 힘들지 않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얼굴도 이쁘고 마음도 고운 그녀는 아직 친구가 없어서 조금 외롭다고 한다. 나중에 돈벌어서 대학을 가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란다. 꿈을 말하는 입매무새가 아주 야무지다.

내가 그녀에게 혹시 주변에 쫓아다니는 남자 없냐고 묻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요즘 그런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나와 룸메이트가 동시에 '누구냐'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누군지 말하면 우리들이 아는 사람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긴다.

그녀를 쫓아다닌다는 남자는 우리 아파트 보안대장이라고 한다. 우와! 보안대장...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직책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무척이나 멋져 보인다. 역시 그 녀석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사실 그녀는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직원들 중에 가장 예쁘고 착한 아가씨이다.

'둘이 사귀냐'고 연달아 물어보자 그녀는 당차게도 아직은 연애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공부 마칠 때까지는 연애는 안할 생각이란다. 어린 아가씨가 속이 꽉 찼다. 그러나 계속해서 해대는 우리들의 질문공세에 대답하는 폼새를 보아하니 그녀도 그 보안대장에게 아주 맘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예전에 근무시간이 새벽 1시까지였을 적에는 그가 매일 그녀를 기다렸다 숙소까지 바래다 줬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둘다 그녀가 부러워서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에게 '어디 남는 보안대장 없냐고 철딱서니없는 농담도 해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남자들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나중에 이 큰언니들이 그 보안대장을 가만히 관찰해보고 '괜찮은 녀석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겠다고 하자 그녀가 이번에는 '좋다'고 흔쾌히 대답을 한다. 역시 그녀도 맘이 있는 게 분명하다.

유쾌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팔짱을 낀다. 반나절 동안 많이 친근해진 듯하다. 그녀의 붙임성 있는 친근함에 우리는, 앞으로 시간날 때마다 자주 함께 놀러다니자는 또 입에 발린 약속을 하고 만다. 그래도 그 말을 할 때는 정말로 자주 그녀와 함께 놀러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이 지나면서 잊어버리는 게 탈이지만.

그런데 웃긴 건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날도 물어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잊어버리고, 매일 물어봐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딴 얘기만 하다 이름 얘기는 까먹고 만다. 오늘은 진짜로,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이제는 엘리베이터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그녀도 우리를 '따지에'(큰언니)라고 부르겠단다.

그러나 나와 룸메이트는 '따지에'라는 호칭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냥 '펑요우'(친구)가 좋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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