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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 국가들이 붕괴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이들은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아직 식지 않은 것 같다. 최근 들어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서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라는 단어가 '푸코' 등의 다른 이름으로 완전히 대체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관련 전기물들의 판매고는 괄목할 만한 수준이다. 작년 초 출간된 실천문학사의 '체 게바라 평전'이 6만부 달성이라는 의외의 선전을 보인데 이어 책갈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와 사상' 역시 주목을 받았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범우사)',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룩셈부르크의 서간집과 평전을 묶은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예담)' 등도 붐의 한 가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전기물을 통해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은 아예 반항과 혁명을 상징하는 코드로 이해될만큼 젊은 세대에게 각광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들처럼 '이상'을 위해 몸을 바친 사람들을 통경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위에 열거한 전기물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 서적들도 앞다퉈 출간되고 있다. 작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전3권,백의)'에 이어 이후의 '레닌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나 책갈피에서 나온 캘리니코스의 '이제 안녕을 말할 때인가'등이 그 예가 되겠다. 이런 책들은 신자유주의 주도의 세태에 대한 사람들의 대안적 관심을 말하고 있다고도 볼 것이다. 마르크스에게는 분명 자본주의에 결여된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과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는 달리 이제껏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기능을 견지해왔다. 마르크스에 대한 재조명은 우리에게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으리라.

또한 붐의 본질에 대한 해석 역시 분분하다. 혹자의 비판처럼 이것은 90년대 프랑스 지식인들(들뢰즈나 데리다 같은 이들)이 주도한 붐의 재탕, 즉 서구 지식 사회와의 시차에 의한 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과는 상관없이 비판적 독서는 언제든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제껏 차지해온 위상을 보더라도 더욱 그렇다. 분명 이렇게 자유롭게 마르크스를 애기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은 예전의 사람들에 비추어 볼 때 행운이 아니겠는가. 한권쯤 시간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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