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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동구 금호4가동에 위치한 대우아파트에서는 8월 12일 일요일 밤 8시와 9시에 연속적으로 두 번 아래와 같은 방송이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주민여러분...

성동구에서는 나라사랑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고 왜곡된 일본 역사교과서 시정을 촉구하기 위하여 [범구민 국기달기운동]을 내일부터 광복절까지 3일간 연속적으로 국기를 게양합니다...

아파트 주민 모두는 내일 출근과 출타 등을 대비하여 지금 바로 국기를 베란다에 게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같이 국기를 게양하여 광복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다음날인 13일 월요일 아침 7시 30분과 8시 30분, 그리고 9시에 연속 두 번의 방송이 또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주민여러분... 아직까지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가구는 지금 바로 베란다에 국기를 게양하여 금호동 대우아파트의 위상을, 위상을 보입시다..."

광복절은 8월 15일. 앞으로 이틀 후이다. 그런데 성동구는 왜 13일부터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것일까?

팩스로 보내온 보도자료를 보면 무엇보다 제목 자체부터 비상하다. '금호4가동 대우아파트 1689세대 전 주민들, 13일부터 3일간 국기달기 동참으로 나라사랑 소중함과 일본 왜곡역사교과서 시정 촉구 결의 다져'라는 제목의 보도자료에는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국기를 100% 게양하기로 한 것으로 쓰여져 있었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얼마나 게양하지 않으면 태극기를 게양하라는 동참운동까지 있을까마는 그래도 성동구의 '100% 태극기 달기 운동'은 다소 강제적인 느낌까지 든다. 오마이뉴스는 13일 오후 대우아파트를 찾아가 보았다.

▲ 태극기를 게양한 아파트 베란다
ⓒ 오마이뉴스 배을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몇몇 신문사들의 사진연출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파트 부녀회의 몇몇 회원들과 아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사진기자들이 원하는 포즈를 취해주고 있었다. 2층에 위치한 아파트 관리 사무소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니 '태극기 판매 : 2층 관리 사무소'라고 쓴 흰색 A4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재미있는 점은 이번 태극기 운동이 전 주민이 참여하는 동참운동이라고는 하지만 주민들이 나서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담당자는 "이번 태극기 달기 운동은 성동구청쪽에서 협조하라는 공문이 내려와서 동참하고 있다"면서 "우리 아파트가 이번 운동에 대표적으로 뽑히게 된 이유는 매일경제 등이 주최하는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규칙적인 시간에 연속적으로 두 번씩 아파트 전체에 방송까지 하는 것은 좀 강제적이 아니냐는 질문에 담당자는 "방송용 멘트는 성동구청에서 직접 만들어 팩스로 보내왔다"며, "'금호동 대우아파트의 위상을 보이자'는 식의 표현은 성동구청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지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멘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동구청이 태극기 달기 운동을 실시한 것은 작년부터다. 작년과 올해의 차이점이라면 지난 해에는 대림한진아파트에서 광복절 당일인 하루만 동참운동을 실시한 반면, 올해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 동안 확대 실시된다는 것이다.

성동구청 총무과의 담당자는 "이번 운동은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성동구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운동으로 대우아파트는 시범지역일 뿐 성동구 전체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 "태극기를 게양하여 금호동 대우아파트의 위상을 보입시다"
ⓒ 오마이뉴스 배을선


게양된 태극기 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나가보니 방금 신문사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부녀회 회원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부녀회장은 "태극기를 3일 동안 게양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행위인가"를 기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 부녀회장은 "이번 태극기 게양 운동이 서울시 전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게 아니었냐"면서 놀라는 눈치였다. 기자가 성동구가 자치적으로, 또한 대우아파트가 시범지역으로 지정되어 100% 게양하기로 되어 있다고 말하자 부녀회장은 "우리아파트만요?"라며 기자에게 되물었다.

대우아파트는 작년 10월 27일부터 입주를 시작한 새 아파트로 아직 입주하지 않은 10여 세대의 가구가 있다. 기자가 만나 본 아파트 주민들 중 몇몇은 아직까지 채 입주가 완료되지 않은 대우아파트를 '살기 좋은 아파트', 혹은 '태극기 달기 운동 시범 아파트' 등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파트 선전을 위한 일종의 홍보효과가 아니냐는 의견도 내놓았다.

특히 이번 태극기 달기 운동에 대해서는 "시키니까 하는데 형식적이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파트 주민인 주부 이아무개 씨는 "광복절에 태극기를 다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굳이 3일 동안 달아야 한다면서 방송하고 재촉하는 게 귀찮아서 달았다"면서 "형식적인 느낌이 들어 씁쓸한 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 100%는 아니지만 높은 게양률(?)을 보이는 아파트
ⓒ 오마이뉴스 배을선
장을 보러 나온 주부 박아무개 씨도 "법이 바뀌어 비오는 날 태극기를 달아도 된다고 하지만 오래된 관습에 익숙해서 그런지 비오는 날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면서 태극기를 달라는 연속적인 방송에 대해서는 "방송까지 몇 번씩 하는 건 좀 강제적인 느낌이 든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한 아파트 주민 이아무개 씨는 "오전 10시에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취재를 나오기로 했다며 빨리 태극기를 달라는 아파트 방송을 들었지만, 광복절도 아니고 비까지 내리는 그 시각에 태극기를 게양할 마음도 없고, 왜 태극기를 게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반강제적으로 태극기를 달게 해 놓고선 신문이나 방송으로 홍보를 하려는 구청의 전시행정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살기 좋은 아파트'라는 대우아파트를 한 바퀴 주욱 돌아보았다. 금호동 고지에 위치한 아파트인지라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아파트의 조망권은 정말 좋았다. 10여 동이 넘는 아파트건물을 각각 올려다보니 100%는 아니지만 많은 가구가 베란다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틀 후인 광복절 아침에는 더 많은 수의 가구가 태극기를 게양할 것이다.

국경일만 되면 신문사와 방송사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이 사는 집을 찾아가 태극기를 게양했는지 안했는지를 취재한다. 어떤 구는 태극기를 달자는 운동으로 국경일 3일 전부터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낸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민된 도리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강제성을 띠는 운동과 국가공무원이라는 신분에 떠밀려 나오는 행동이라면 이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모쪼록 이번 광복절에는 56돌이나 된 광복절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애국선열들의 애국심을 기리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아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든 생각이다.

▲ 성동구청에서 팩스로 보내온 아파트 방송용 멘트
ⓒ 오마이뉴스 배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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