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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세상 누군들 광대로 살다가는 것이 아니랴만
나 박세환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광대로 살아온 지
올해로 서른 여덟 해가 되었다.

푸른 이끼의 기와집 추녀가 잇대어 있고
사철 행랑채 장명등이 꺼지지 않던 종가(宗家)
그 옛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나는 오늘도 유랑의 광대로 떠돌고 있다.

어느새 이순을 바라보는 내게
이제 고향은
현실의 지도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꽃샘바람에 펄럭이는
'동춘'의 깃발을 보며
생각한다.

저 허공에 펄럭이는 깃발 꽂혀 있는 땅이면
그곳이 어디든 고향이 아닌가고,

내 고단한 육신의 마지막 잠을
누일 곳도
바로 저 깃발 아래 천막이 아닌 가고.



억수 같은 가을비가 내리던 지난 9월의 마지막 밤 10시.. 천년 고도 서라벌(경주)에서 한 중년 남자의 흐느낌이 있었다.

"할아버지 종손 박세환이가 38년만에 찾아 왔습니다. 이제는 세계의 1인자가 되겠습니다."
동춘서커스단 박세환(57. 한국곡예협회 이사장) 단장의 사모곡 이었다.

조부 박화준 옹의 존영 밑에서 울먹이는 박세환의 손에는 동춘서커단의 단체사진이 들려 있었다. 작고한 조부의 사진(존영) 밑에 펼쳐진 또 한장의 사진은 사진 이상의 의미가 묻어 있다.

밀양 박씨 가문의 종가 종손으로 태어나 조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가 19세의 까까머리로 "연예인이 되겠다"고 무단 가출한지 38년만의 귀향 이었던 것이다.

떠돌이(?) 생활을 했을 때도, 끼니가 없을 때도,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맬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38년전인 1963년 2월, 19세의 나이로 서커스단을 따라 사라져버린.. 장손(박세환)을 조부 박화준은 천리길을 단 걸음으로 찾아와 팔목을 끌었다.

"앞장서라 너는 우리 가문의 기둥이다, 종가의 종손이다, 딴따라는 절대 안된다." 그러나 조부의 재촉은 박세환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 때 그날도 폭우가 내렸다. 그래서인지 박세환의 감회는 슬픔으로 변해 있었다.

그 조부가 이듬해인 1964년 세상을 떠났을때, 불효에 대한 죄책감에 대성통곡을 했던 그 날 박세환은 맹세했다. "대장부의 꿈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귀향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올해 그 뜻을 이룬 후에 마음 먹고 귀향한 것이다.

물론 지난 1976년 국내 최고의 동춘서커스단 제3대 단장에 등극한 후, 지난 1983년에 고향 경주에서 한차례 공연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다. 그래서 더러 경조사 때 고향에 왔을 때도 "몰래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타향살이 38년째인 올해 정월 초하루부터 화려한 추석 귀향을 추진했다.

추석특집 '동춘서커스공연'이 그것인데, 그가 도착하던 날, 이미 단원들은 경주시 황성공원 앞 북천내 하천부지에 동춘서커스단의 특설극장을 세워 놓고 뒷 날에 선보일 개막공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세계적인 '평양교예단'도 배워 갔다는 '중국기예단'과 함께 입성했다.

그래서 극장을 지을 때부터 화제가 만발했다.
"야! 중국서커스도 왔나봐, 참 예쁘게도 생겼다. 동춘서커스 소속 국제부팀이래, 참, 동춘서커스 단장이 경주 사람 이라면서?"
"그래. 탑정동 사람이래. 예전에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왔던 박화준 옹의 장손이래, 언제부터 공연하지?"

그렇다. 박세환은 밀양 박씨 가문의 종가 종손이었다. 1944년11월 20일 경주시 탑정동 269번지에서 박상조 씨와 이용주 씨의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7년 황남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 2월 경주중학교(21회) 1963년 2월 경주고(12회)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 누구가 알았겠는가? 그의 운명을......

종가 종손으로 금지옥엽 자랐던 그는 경주에 온 서커스를 보고는 단번에 가출을 해버렸다. 당시의 서커스는 지금과는 달리 곡예는 막간에 했고, 쇼와 연극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이었다. 무대에 선 사회자도 연극하는 배우들도 모두가 그의 이상형이었다. 서커스가 이동했을 때 박세환도 함께 떠났다.

그 때부터 험난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금지옥엽은커녕 신출나기 군기잡는 고참들의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행운이 다가왔다. 1965년 3월 그의 끼를 알아 본 스탭들이 조기에 그를 무대에 서게 하려는 계획을 통보받았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가속이 붙기 마련인데, 박세환도 예외가 아니었다. 곱상한 외모에 타고난 언변에다 가창력까지 겸비한 그는 언필칭, 준비된 연예인이었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주사회자로 데뷔했고, '어머니 울지 마세요'에서는 주연배우로 인기를 쌓았다. 인기 정상에 올랐다고 판단했던 1971년 그는 팬이었던 한 여인과 결혼했다.

가정을 가진 박세환은 갑자기 작고하신 조부와 부모님 뜻을 따른다며 서커스를 떠났다. 새로운 아니, 평범한 가장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박세환은 제2의 인생을 사업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개인 사업 4년째인 1975년 자신이 활동했던 동춘이 망해간다는 비보를 접하고는 다시 동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사업으로 모은 자금과 집안 땅을 판 돈으로 동춘을 인수하여 1976년 제3대 동춘서커스단 단장이 되었다.

비단 동춘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서커스가 불황을 겪고 있던 시절.. 그는 이를 악물고 재기를 노렸다. 1980년대의 칼라TV 출현은 그의 의지에 상당한 타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정면돌파(?)로 승부를 걸었다.

1980년 2월 국내 서커스 최초로 연계약제(8명)를 시행했다. "곡예사 인건비를 올린다"는 타단체 단장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프로 세계에서의 몸값은 능력 상승을 불러온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 시기에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였던 SBS 쟈니윤쇼(29회분)에 출연하는 등 인기 명사가 되기도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982년 3월 인천에서 공연을 할 때, 태풍으로 극장이 파손되는 참사도 있었고, 그 아픔이 가기도 전인 1983년 1월 17일 광주 공연 때 갑자기 한파가 몰아쳐 동춘의 마스코트인 코끼리 제니가 죽기도 했다.

코끼리가 죽었을때 박세환은 사흘간이나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다가 그는 사무실을 나와 허풍(?)을 떨었다. 의기소침해 있던 단원들 앞에서 동물원과 동물거래소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동춘입니다. 코끼리 가격이 얼마입니까? 인수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몇 만원도 없었다"고 한다.

박세환은 그렇게 한국 서커스의 고난을 함께 해 나왔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이야 그렇다고 치고 서커스를 불쌍하게 느끼는 관객들의 시선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1989년 5월 사단법인 한국곡예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된 박세환은 지난해 6월 동춘에 국제부를 창설하여 러시아 1팀, 중국 3팀을 거느린 다국적서커스단의 총수가 되었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스스로 자생해 온 우리(?)의 동춘서커스가 다른 나라 서커스(중국, 러시아) 단장들이 큰(?) 단장으로 모시는 명사가 되었다.

그가 조부 박화준 옹의 존영아래서 흐느끼는 의미는 단순한 흐느낌이 아닐 것이다

38년만에 자신이 집대성한 동춘서커스단을 이끌고 화려하게 귀향한 그의 가슴에는 밀양 박씨 종가 종손이라는 자긍심 보다도 더 큰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은 동춘이 세계 최고의 서커스단이 되는 것이다.

천년고도 서라벌의 고적은 의구한데, 조부와 선친은 작고했다. 박세환은 노모의 손을 굳게 잡았다.
"불효자식 효도 할 터이니 제발 어머니라도 무병장수 하시라"고.

노모와 중년의 아들 박세환이 재회하던 날 밤, 경주 탑정동 밀양 박씨 종가의 장명등은 우중임에도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동춘서커스단에 다국적 곡예사들이 합동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전통의 동춘서커스단에 대해 '합작'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팀은 언제 까지나 동춘국제부의 일원입니다. 그래서 비록 외국팀 단장이 곡예사를 인솔해 와도 동춘에서는 국제부 산하의 부장의 통솔을 받는 팀장으로 국한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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