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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거창양민학살사건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첫 판결의 의미는 우선 이 사건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다. 또한 국가범죄로 인해 유족들이 겪어온 유무형의 피해에 대해서도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그 동안 국가의 '직무유기'를 인정했다.

그러나 학살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의무는 이미 시효가 완성돼 소멸됐다고 밝혀 이를 둘러싼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법원은 판결은 1998년 4월 27일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한 일본 야마구찌 지방재판소 시모노세끼 지부의 판결을 연상케 하고 있다.

당시 일본법원은 조선인 '위안부'피해자들에 대한 일본국의 손해배상청구는 기각하고, 단지 이들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특별 배상입법을 해야 할 의무를 위법하게 게을리한 데 따른 정신적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거창사건에 대한 창원지법 진주지원의 판결은 국가의 특별 배상입법 의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민법상 소멸시효가 완성된 손해배상청구권을 부활시키는 문제는 결국 특별법 제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부기함으로써 사실상 특별법의 입법 필요성을 인정했다.

사건 이후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 인정

재판부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생명권을 집단적으로 침해하는 이른바 민간인학살사건은 그 가해자가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에 대해여 우월한 지위를 가지는 국가 자신"이라고 하여 민간인학살사건이 '국가범죄'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에 따른 국가의 의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첫째 민간인학살행위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고, 둘째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적절한 배상을 하며, 셋째 학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넷째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의무를 진다"고 밝혔다.

판결문은 이어 "국민은 국가에 대하여 그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할 권리(신원권 내지 알 권리)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손해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사후조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서 "만약 국가가 국민에 대한 위와 같은 보호의무를 다하지 아니한 결과, 희생자들에 대하여 피해를 발생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남은 피해자나 그 유족들에 대하여도 파생된 권리 침해를 계속적으로 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위자료 지급의 범위와 대상과 관련, "그러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은 유족은 거창사건 희생자들과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들로 한정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희생자들의 직계존비속 및 형제자매들만을 인정했다. 따라서 희생자들의 조카나 삼촌 등 친인척은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위자료 지급대상에서 배제했다.

거창사건 자체로 인한 위자료(상속분) 청구는 기각

재판부는 사망자에 대한 위자료 지급과 관련해 이 사건의 손해배상 청구 역시 민법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점을 이유로 유족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재판부는 "거창사건은 국가의 조직적인 인권유린 행위였기 때에 국가권력의 정상적 법 운영 형태에서만 적용 가능한 소멸시효제도의 적용이 배제돼야 한다"는 유족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대법원 판례(1996. 12. 19. 선고 94다22927)를 들어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의 손해배상청구 역시 민법상 불법행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실정법 테두리 안에서 청구권을 행사하는 경우 소멸시효는 적용돼야 한다"고 밝힌 뒤, "민법상 소멸시효가 끝난 손해배상청구권을 부활시키는 문제는 국회의 특별법 제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사실상 청구권 행사가 어렵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시효가 중단돼야 한다"는 유족측의 요구에 대해서도 "유족들이 1980년 이후 진정 또는 청원을 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늦어도 80년 이후에는 사망자의 직접적인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족의 반응 및 여파

유족과 변호인은 일단 항소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준석 변호사는 "소멸시효란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를 태만히 하여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데 대해 적용하는 것이지, 민간인학살사건처럼 국가의 강압에 의해 소송자체가 불가능했던 사안을 놓고 국내법과 실정법에 따른 시효소멸 논리를 적용한 것은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설사 재판부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유족들이 50년간 겪어온 고통의 무게에 비해 직계존속 1000만원, 형제자매 500만원이라는 위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은 일단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유족보상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유사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 판결대로라면 이번 소송의 당사자인 거창사건 유족들뿐만 아니라, 이와 동일한 사건인 산청.함양의 유족들도 소송을 통해 유족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현재 특별법이 제정돼 위령사업이 진행 중인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유족들도 같은 적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확고한 물증과 증거가 나타난 경북 문경이나 함평 민간인학살사건 유족들도 이번 판결에 자극받아 유사소송을 제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민간인학살특별법 전국공대위 집행위원장)는 "이번 판결로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면서 "재판부도 밝혔듯이 시효문제는 특별법 제정만 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전국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서 약간 비켜나 있던 거창사건 유족들도 특별법 제정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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