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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ABC의 간판 앵커 피터 제닝스와 CBS 시사프로그램 <60분>의 리포터 마이크 월레스가 PBS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언론인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가 될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월레스: 제닝스 씨가 종군기자로 전장에 날아가 북한군 부대를 동행취재하고 있다고 칩시다. 북한군 부대가 미군을 습격하기 위해 매복을 준비하고 있소. 제닝스 씨는 그냥 취재만 하겠소 아니면 미군에 경고를 하겠소?

제닝스: 내 생각엔.. (한참을 망설이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미군에게 경고를 할 것 같습니다.

월레스: (펄쩍 뛰며) 경악을 금치 못하겠소. 당신은 기자요.

사회자: 하지만 기자라도 같은 미국인이 떼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월레스: 아니 당신은 기자라니까. 기자에게 취재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없는 거요.


20세기 양자물리학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충격적 사실은 세상에 절대객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의 행태를 관찰하기 위해 빛을 쪼이는 순간 원래의 모습은 사라져버려 그 실체를 영원히 알 수가 없다는 교훈이다.

제3자의 관찰 때문에 원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잘 하던 재주도 멍석 깔아주니 못한다"는 속담을 남기기도 했지만 역사적 사건을 취재하는 언론인처럼 이런 현상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청산유수로 주장을 펼치던 사람도 TV 카메라를 들이대면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결국 종이에 대본을 써주어 국어교과서 읽듯이 인터뷰를 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TV에서 많이 보았을 것이다. 혹은 기자들이 닥치자 갑자기 대오를 정비해 소리높여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도 있다. 양자역학이나 기자의 취재현장이나 제3자의 관찰행위 자체가 이미 사실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들이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사초를 기록하던 사관이 주제넘게 어전회의에 말참견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전쟁취재에 나선 종군기자 역시 애국심에 흔들려 사건의 현장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마이크 월레스의 언론관이다.

하지만 오늘자 'S.F 크로니클'은 미국언론이 이런 역사의 기록자로서 원칙론을 고수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전한다.

지난 9월28일 'USA투데이'는 미군 특수부대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 침투해 작전을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하지만 <나이트리더> 통신사는 그린베레와 네이비실 부대가 작전을 수행중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특종보도를 하지 않았다. 국방부에 문의를 하자 미군에 위해를 끼칠 수 있으니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에 순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영방송 'NPR 라디오' 소속 로렌 젠킨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정부의 대변인이 아니다. 단지 역사와 정보 그리고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전할 뿐이다. 국방부는 절대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며 코웃음을 친다.

로렌 젠킨스나 마이크 월레스같은 언론인은 아직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부시 대통령이 중요한 정보가 언론에 새 나간다며 대노한 뒤 주요 네트워크 방송사와 신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나마 확보한 정보조차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백악관 공보처는 할리우드 영화사 간부와 제작자들을 워싱턴에 불러 모아 2차대전 때 했던 것처럼 미국인의 전쟁의지를 북돋우는 대국민 선무방송까지 논의하게 했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한 제작자들은 백악관 관리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아무리 전시라도 정부가 나서 언론의 보도행위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반감을 보이는 것이 미국언론이지만 거대 언론사의 사장단들은 스스로 전시보도준칙 같은 것을 만들어 국익 우선의 보도자세를 취할 것을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실제로 생화학 테러를 묘사한 <에이전시>라는 드라마가 백악관의 요청으로 방영이 취소되기도 하는 등 미국 언론의 보도행태가 눈에 띄게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언론보도에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는 일단 수긍할 수 있지만 과연 무엇이 국익인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시각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국방부의 '국익'과 언론의 '국익'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베트남전처럼 소수 군산복합체의 입김에 휘둘려 정부가 부도덕한 전쟁을 획책할 경우 '국익'이란 것은 한낱 이권집단의 선동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기도 했다.

미국언론이 이번 테러전쟁에서 국익보호와 역사기록이라는 모순된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다.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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