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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정전에서의 조망 명정전에서 홍화문 쪽을 보았다. 그 옛날 조선의 왕들도 이렇게 보았겠지. 그러나 지금은 서울대병원 등으로 앞이 막혀 있다. ⓒ 권기봉 |
창덕궁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냐고 주위 어른들에게 묻는다. 그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열에 여섯 일곱은 대개가 비원을 떠올리기 일쑤다.
이번엔 창경궁하면 뭐가 생각나느냐고 물어보자. 이에 대한 답은 별 이견이 없이 대다수가 식물원 혹은 벚꽃놀이, 즉 '창경원’을 처음으로 꼽는다. 비단 필자의 주변 사람들에게만 물은 결과 나오게 된, 객관성이 부족한 결과일까.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겠으나 직접 창경궁을 찾아가보면 동물원이 있었던 궁이 갖는 비애가 은근히 느껴져온다.
창경궁을 찾아가자면 혜화동 쪽에서 들어가는 길과 종로 3가 쪽에서 들어가는 길 등 여러 길이 있겠지만, 지하철 종로3가 역에서 시작해 창덕궁의 돈화문을 지나는 길을 따라가본다. 특히 오늘은 종로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 사이길인 돈화문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답사를 시작해 보자. 이른 아침 한산한 돈화문로를 따라 걷다 보면 멀리 돈화문의 위엄 서린 모습이 보이면서 궁궐 답사를 왔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 | ▲ 왜색 짙은 육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육교가 율곡로에 놓여 있다. 일제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지맥을 끊고 있다. ⓒ 권기봉 |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잘 닦인 아스팔트길을 따라 걷자. 그러다 보면 이내 육교 하나가 길 양옆의 높은 둔덕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육교의 모양새나 걸려 있는 위치로 보아 그저 보행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엔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기 전까지는 길이 있던 곳이 아니라 응봉에서 종묘 쪽으로 산자락을 이어주는 둔덕으로 이어져 있던 자연스런 등성이었다. 그러던 것을 일제시대에 들어 경복궁 광화문에서 시작해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 동대문까지 총연장 약 3km의 율곡로가 뚫리면서 이 지역을 지나게 되어 결국은 종묘와 창경궁 등의 동궐을 이어주는 지맥을 끊어버린 것인데, 실제로 육교가 연결해주고 있는 것은 양쪽의 보도가 아니라 창경궁과 종묘이다. 원래는 이어져 있어야 할 길을 일제시대부터는 요상하게도 공중을 부유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육교를 지나 완만한 경사길을 내려오면 교차로가 보이며 왼쪽 대각선으로 육중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서울대병원)이 그것으로, 마침 이 건물 때문에 우리는 창경궁 정문을 멀리서부터 조망하며 곧장 궁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즉 창경궁의 정문이 홍화문인데, 홍화문 앞으로는 창덕궁이나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대로가 가로질러가고 있는 것이다.
| ▲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 8년인 1616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 권기봉 |
그래도 궁에 왔으니 정면에서 눈인사라도 나눠야 하지 않을까. 길을 건너가는 수고를 해서 서울대병원 쪽에서 창경궁을 한번 조망해보자. 홍화문은 정면이 삼 칸으로 형식적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돈화문보다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궁으로 들어가지 말고 잠깐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들어가도록 하자. 홍화문 북쪽에 한번쯤 보아둘 만한 무언가가 있기에. | | ▲ 월근문 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위해 고쳐 지은 경모궁에 드나들기 위해 만든 문으로, 서울과학관 옆에 있다. ⓒ 권기봉 | 홍화문에서 서울과학관 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두 칸 짜리 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월근문이다. 원래 서울대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는데 이를 고쳐 지으면서 쉽게 궁에서 그곳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특별히 낸 문이 월근문이다. 일반적인 문들과 달리 두 간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그 높낮이도 각각 다르게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형식을 취하고 있다.
| ▲ 옥천교 유일하게 실제로 물이 흐르는 금천교인 '옥천교'이다. 특히 명정문의 회랑 일부가 이리로 직접 연결되어 결국 궁성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다른 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 권기봉 |
이제 홍화문 앞으로 들어와 표를 산 뒤 창경궁에 들어서자. 들어서자마자 앞으로 금천교인 옥천교가 보인다. 그런데 이곳 창경궁에서는 경복궁에서도 창덕궁에서도, 그 어떤 궁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금천에 '실제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보통 다른 궁들의 경우 근래에 들어 알게 모르게 물길이 끊겼는데 이곳 창경궁 금천만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고, 특히 이는 나중에 금천의 발원지 쪽으로 답사를 하면서도 계속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 ▲ 명정전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이다. 특히 조정의 박석을 깔 때에는 일부러 빈 틈을 넣었는데 일제시대 때의 잔디를 걷어내는 보수 과정에서 그 틈을 무시한 채 빈틈없이 박석을 깔아버렸다. ⓒ 권기봉 |
잠시 이 소중한 반김에 고마워해한 다음 앞을 보자. 앞에 서 있는 문 사이로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원래는 문이 금천과 앞의 문 사이에 하나 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 | ▲ 명정문 홍화문에서 명정전에 이르는 축이 남향이 아닌 동향이라는 점, 그리고 지형적인 이유로 명정문이 살짝 각도를 꺾어 앉음으로써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덜었다는 특징이 있다. 즉 명정문을 중심으로 명정전과 홍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권기봉 | 일반적으로 법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경복궁의 광화문 지나 홍례문, 홍예문 지나 근정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곳 창경궁에서만은 문 하나가 생략되어 정문인 홍화문과 법전을 둘러싼 행각에 이어진 명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법전 명전전에 이를 수가 있다. 명정전은 다른 궁의 법전들과는 달리 기단은 이층이지만 단층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면 다른 궁에서도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왠지 휑하다.
| | ▲ 나홀로 남향 편전인 문정전이 법전인 명정전과 내전의 영역 사이가 아닌 명정전의 남쪽에 붙어, 이것은 또 다른 것들과는 달리 남향을 하고 있다. 또 기둥도 원형이 아니라 일반 살림집을 나타내는 사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이의 남향을 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 권기봉 | 다음에 찾아볼 곳은 편전 문정전이다. 문정전은 왕이 실제 정사를 논하던 곳으로 명전전의 왼쪽으로 남향을 하고 앉아 있다. 최근에 복원을 한 것이라 깔끔해 보이긴 하지만, 마치 20대 청년에게서 50대에서나 있을 법한 중후함이 풍겨 나오는 것과 같은 어색함이 느껴진다.
특히 문정전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명정전만 동향한 것을 두고 이왕 다시 짓는 것이니 남향으로 고쳐짓자는 신하들의 의견이 있었다. 이에 광해군은 선조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그대로 동향으로 짓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문정전만은 유독 남향을 하고 있었는데 광해군은 이 건물까지 동향으로 다시 지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하들의 거듭된 반대로 문정전만은 그대로 두고 짓게 되어 일종의 타협을 이루게 된 것이다.
| ▲ 숭문당 1830년 화재에 의해 연소되었던 것을 그해 가을 다시 지은 것으로, 이름에서도 풍기는 왕과 신하가 모여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 권기봉 |
명전전과 문정전 뒤쪽으로 있는 것이 숭문당이다. 숭문당은 왕이 문신들과 학문을 논하던 건물로, 앞과 뒤의 높낮이를 고려해 앞쪽은 높은 초석을, 뒤쪽으로는 낮은 초석을 두어 조화롭게 배치하였고,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인데 반해 공포도 간소한 초익공이고 처마도 홑처마인 것이 눈에 띈다.
| | ▲ 함인정 원래는 여러 건물들이 있었던 터이나, 인경궁에서 건물을 헐어다 창경궁을 중수할 당시 함께 옮겨온 함인정만이 그 자리에 섰다. ⓒ 권기봉 | 숭문당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원래는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어야 할 공간에 넓은 공터가 나타나면서 한 건물이 공터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이 보인다. 함인정이다. 한편 함인정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살피면, 왼쪽으로는 경춘전이, 함인정의 뒤쪽으로는 환경전이 있다. 경춘전은 익히 알고 있는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장소이자,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건물이며, 환경전은 중종이 승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그런데 원래 이 건물들이 여기에 처음 세워진 것은 아니다. 함인정과 경춘전, 환경전뿐만 아니라 왕비의 시어소인 통명전과 양화당 등은 창경궁이 인조 반정으로 인해 상당 부분 망가졌을 때 인경궁의 전각을 옮겨온 것이다. 한편 환경전과 명전전 사이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석탑 한 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경복궁의 그것들처럼 일제가 박람회를 하면서 조경용으로 옮겨왔거나 '창경원'으로 그 역할을 바꾸면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 ▲ 통명전 해마다 열리는 다도 경연대회가 올해도 어김없이 통명전 앞에서 열리고 있다. 통명전에 직접 현수막을 걸어놓은 것이 기가 막히다. 차를 즐기기 위한 도(道)는 문화재 보호의 도를 앞서는 것일까. ⓒ 권기봉 |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왕비의 침전에 다다르게 된다. 창경궁의 중궁전 이름은 통명전으로 역시 용마루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 한편 그 동쪽에 있는 것은 통명전과 함께 인경궁에서 이사온 양화당이고, 거기서 더 오른쪽으로 넓게 노출되어 있는 암반을 지나 폐쇄된 행각을 두르고 있는 건물은 정조가 항상 기거하던 공간이자 승하한 영춘헌이다.
| | ▲ 영춘헌 정조가 항상 기거하던 건물이자 승하한 장소, 영춘헌이다. ⓒ 권기봉 | 온 길을 돌아 다시 통명전 쪽으로 가자. 통명전의 왼쪽과 뒤쪽으로 언덕이 보이는데, 그리로 올라서 보자. 돌계단을 오르면 창덕궁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나오는데 지금은 잠겨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거기서 계단을 내려오지 말고 다시 영춘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럼 길이 꺾이는 지점쯤에서 풍기대를 만날 수 있다. 풍기대는 오늘날의 풍향계와 풍속계처럼 바람의 방향 및 속도를 측정하던 장치로, 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이곳 창경궁의 풍기대는 이전에 훼손이 되었던 것인지 가운데 부분이 절단되었던 것을 다시 붙여 놓은 것 같아 보인다.
| | ▲ 풍기대 경복궁에 있는 풍기대와 그 모양이 비슷한데, 천이나 깃대는 원래의 모양이 아니다. ⓒ 권기봉 | 풍기대에서 길을 왼쪽으로 틀어 가고 있노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올라가는 조그만 길이 보인다. 그리로 가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한번 올라가 보자. 흥미로운 것이 놓여 있으니. 왠지 길을 잘못 든 것 같단 후회를 하다 보면 앞에 비석과 함께 마치 절집의 부도처럼 보이는 특이한 모양의 탑이 있다. 바로 성종태실비와 성종태실이다. 이전에는 왕이 태어나면 그 태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보관하고 기록을 남겼나 보다. 궁궐 안내자료에도 잘 나와 있질 않은 것이니 오늘 이것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아닐까.
가던 길을 재촉하면 이내 춘당지라 불리는 너른 호수와 마주치게 된다. 지금은 호수와 같이 변해버리긴 했지만 이전에는 과거시험도 보고 군사훈련도 하던 곳이 바로 이곳 춘당지 일대이며, 특히 이곳은 작은 내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각각 다섯 배미의 논이 있던 왕의 농경지, 즉 내농포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시대에 들어 본 모습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는데, 특히 이곳에는 연인들을 위한 보트장도 있었고 케이블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우리 역사에 있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때나마 궁 안에 그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영 마뜩찮다.
| ▲ 춘당지의 발빠른 새시대 적응? 원래는 왕이 농정을 살피기 위해 내농포가 있던 춘당지이지만, 일제시대 때는 유람객들을 위한 보트장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그저 결혼 사진을 찍는 예비 신랑신부들로 넘쳐 나고 있다. ⓒ 권기봉 |
한때 내농포였던 춘당지를 거슬러 계속 올라가면 '진짜' 춘당지에 이르게 된다. 즉 현재의 춘당지는 마치 호리병처럼 가운데가 잘록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잘록한 부분을 중심으로 북쪽 부분이 실제 춘당지이다. 이 곳에서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춘당지의 발원지로 보이는 샘도 볼 수 있다.
| | ▲ 오얏꽃 창경궁 내에 있는 식물원에서는 이 문의 머름대에서와 같은 오얏꽃 문양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 ⓒ 권기봉 | 아직도 창경궁이 제 위치를 찾지 못했음을 이 부근에서 절감할 수 있다. 춘당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식물원이 그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왕실의 권위를 낮추는 의미에서 특히 창경궁을 많이도 훼손했는데, 벚나무를 심어 밤낮으로 벚꽃놀이 축제를 벌이는가 하면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원숭이 구경하러 궁궐로 오라'는 식으로 선전을 했던 것이다.
특히 궁 안에 있던 동물원은 현재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한 상태이지만, 식물원은 아직까지도 남아 창경궁의 슬펐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건물 자체도 왜색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오얏꽃 문양이 출입문에서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식물원을 도배하고 있다. 한편 식물원 뒤편으로는 창덕궁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창덕궁을 통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마지막. 일제의 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식물원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동물원 자리는 어디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일까. 창경궁 비극의 시작이자 끝, 동물원 자리까지 찾아가자면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춘당지에서 발원한 금천을 따라가면 답사를 출발한 홍화문에 다다르게 되고, 홍화문을 지나 선인문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곳 선인문 안쪽 지역이 이전에 동물원이 있던 자리인데,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간 뒤에는 그저 황량한 잔디밭으로 남아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가족들을 위한 쉼터인 것처럼. 이곳 잔디밭은 동물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세자궁인 동궁을 비롯해 궁 내 군대를 위한 부속 건물 등으로 꽉 들어차 있던 장소이지만 역시 일제 시대 이후로 부서지고 훼손되어 그저 휑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관천대는 홀로 남아 씁쓸해 하는 답사객을 맞아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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