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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며 살아온 여인. 그의 몸 가짐이 얼마나 조신했던지 젊은 청상과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은 대단했다. 누군가는 정절의 상징인 열녀비라도 세워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사단은 그렇게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홀로 잠을 자던 여인의 방에 흑심을 품은 이웃 마을 남자가 침입했던 것.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란 여인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억센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던 여인은 마침내 가슴에 품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자신의 목을 찔렀고, 놀란 남자는 그대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상처가 깊지 않았던 탓에 여인은 목숨을 건졌지만 진짜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미 마을 사람 모두가 지난 밤의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소문이 퍼짐과 함께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목숨을 건진 여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왜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고, 살아서 마을의 신성한 전통에 먹칠을 하느냐고. 누군가는 여인이 그 남자와 모종의 관계를 예전부터 맺어왔을 것이라며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 여인을 강제로 범하려 했던 남자의 범죄행위에 있지 않았다. 여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에 죽음으로써 결백과 정절을 지켜내지 못한 채 살아 불명예를 남긴 여자의 행동에 있었다. 결국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여인은 스스로 목을 매고 서러운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역사는 비단 한국사회에서만 발견되는 특징이 아니다. 프랑스의 초기 역사에서도 동일한 인식이 발견된다.

앙시앙 레짐 시대에서 개인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기 전인 18, 19세기까지. 강간의 희생자들은 악으로 규정된 음란함의 동조자로 낙인 찍혀 가해자들과 함께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 처벌이라는 것도 가해자의 신분과 계층에 따라 관대하게 처분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공정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었다.

개인에 대한 인식의 도래와 함께 강간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도덕적인 비난과 처벌의 근거에서 신체적인 위해라는 개념을 도출해내고 마침내 정신적인 폭력의 정점이라는 개념까지 도출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 「강간의 역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강간이라는 폭력적 범죄 행위가 어떤 배경과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살핀 상세한 보고서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직 '강간의 역사는 씌여지지 않았다'고. 이는 여전히 강간을 둘러싼 인간의 의식은 편견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으며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 냥 믿어버리고 있다고. 따라서 더 깊은 논의와 성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인 셈이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다고 믿고 있지만 강간과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여전히 그 옛날 가슴에 은장도를 품고 살았던 여인네의 그것에서 한 발도 넘어서지 못한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성폭력 관련 고소가 늘어나고 유죄를 선고받는 일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에는 은근히 피해자의 동기 유발을 지적하고 싶어하는 고루하고 한껏 비틀린 구시대의 욕망이 꿈틀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강간의 역사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명백한 범죄와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적 편견과 명백한 피해자인 여성의 문제가 어떤 불화 속에서 진행되어왔으며 그것이 어떤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 있는 깨달음이다.

덧붙이는 글 | <강간의 역사> 조르쥬 비가렐로 / 당대 / 408쪽 / 13,000


강간의 역사

조르쥬 비가렐로 지음, 이상해 옮김, 당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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