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전 대덕연구단지의 한 과학기술인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모임은 단지내 중견 연구원들이 공학박사 출신의 국회의원을 초대하여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에 대해 강연을 듣고 연구원들의 애로사항을 얘기하는 그런 자리였다. 그 날 참석한 어느 연구소장이 한 얘기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 두려워 어려서부터 세뇌(?)를 시켜왔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 아이가 크니까, 용돈이 궁하거나 야단을 맞으면 "아빠, 그러면 나 공대로 갈 거야"하며 겁을 준다는 것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 웃음은 큰 '탄식'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30명 가량의 책임급 연구원들의 갖가지 얘기가 터져 나왔다. 대개 한평생 과학기술계에 몸담은 데 대한 깊은 좌절과 회한이 묻어 나오는 그런 얘기들이었다.
며칠 전 정부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고등학생의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 추진전략에는 '청소년 과학교육 내실화', '과학영재교육과 과학고등학교 운영정상화' , '이공계 진학지도 개선' 등이 들어 있었는데, 그 대책이라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대책이란 것이 모두 일부 학생들에게 단기적인 유인책은 될지언정 장기적으로 이공계 기피현상을 없앨 수 있는 대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공계대학 기피현상은 몇 개 부처의 관료가 모여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한참이나 잘못 파악한 것이다. 정부관료들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만큼 뿌리깊은 문제라는 것이다.
필자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과학기술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그런 것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밥그릇 챙기기로 비칠까 구차스러워 입을 닫고 있었을 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대덕연구단지의 그 기관장이 자식은 자기가 살아온 길로 보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고 세뇌를 시작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 이 사회의 과학기술자 홀대 분위기 속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렵게 공부해봐야 비전이 없다는 것이다. 비전이 무엇인가. 경제적 처우 (과학기술자들이 부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지위, 긍지, 보람 같은 것들이 한데 뭉뚱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공계로 진출했을 때 이 중 무엇이 돌아오는 지를 생각해보면 현상은 눈에 보인다.
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원인으로 '수학, 과학이 공부하기 어렵다'는 것과 '부모들도 자식들이 공부하기 힘든 이공계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한다'가 단연 상위에 꼽혔다고 한다.
수학, 과학이 예전엔 쉬웠는데 지금은 어려워진 것인가? 아니다. 예전에는 그런 어려운 공부하면서도, 이공대 가는 것이, 그리하여 과학기술자가 되는 것이 자랑이고 보람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조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공헌을 하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긍지와 보람이라는 것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공계로 간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그나마 남아 있던 긍지와 보람조차도 느낄 수 없는 사회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비슷한 노력으로 갈 수 있는 의료계열 졸업자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너무 커져버려 상대적인 박탈감을 심하게 느껴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비전의 요소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필자에겐 이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보인다. 지금도 어려운 공부해서 과학기술자가 되더라도 위에서 말한 비전이 있다면 우수한 인재가 왜 안 가겠는가.
대책을 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 것이다. 그러니 대책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지금 대부분의 과학기술인, 심지어 과학기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조차도 "내 자식은 절대로 이공계열로 안 보낸다"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왜 일반인조차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과학기술인들이 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기는커녕 그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문제풀이는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이 없이는 지금의 이공계기피 문제는 영영 풀지 못할 난제로 남겨져 이 나라의 장래에 큰 낭패를 불러올 수도 있다.
지금도 바로 이웃 중국과의 기술격차가 크게 좁혀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이러다간 얼마 안 있어 우리 나라가 다시금 기술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고 부존자원 변변한 것 하나 없어 오로지 수출로 국부를 창출해야 하는 우리 나라에게 그 결과가 우리의 삶의 질과 안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한다면 잠이 안 올 정도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문제는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오랜동안 꾸준히 채근해도 그 효과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리깊은 심각한 문제다. 그만큼 이 문제를 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그 사이에도 이공계 기피현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될 것이다. 정부부처 관계자 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과학기술인이건 아니건 모두가 시급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하니리포터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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