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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새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공계 기피는 자연스런 시장논리의 반영이다. IMF를 전후하여 30대 기업중 17개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들 기업치고 기술개발에 과투자 혹은 선투자하여 유동성 위기를 당한 곳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주인이 바뀐 TOP 랭킹 기업들인 대우그룹, 기아그룹, 한보그룹, 쌍용차, 삼성차는 하나같이 규모나 설비의 신화에 경도되어, 국내외 생산판매 네트워크(대우)나 설비. 공장(기아, 한보, 삼성, 쌍용, 대우)같이 하드웨어에 과투자 했다가 유동성위기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시장환경이나 제품의 성격상 그렇게 급작스럽게 규모를 키워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기에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고, 능력을 키워서 승부를 하는 것이 결코 무망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차를 빼놓고 나머지 자동차 회사들이 무너진 이유는 결코 세계적 공급과잉이 1990년대 중반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망한 것이 아니다. 미국, 일본, 독일의 명차들이 한국 시장이나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망한 것도 아니다. 또한 현대자동차 제품이 갑자기 히트를 치면서 시장을 독식해서 망한 것도 아니다. 이들이 망한 것은 자동차라는 제품의 성격자체가, 가격(규모는 주로 원가를 낯추기 위한 수단이다)에 따른 수요 탄력성이 적은 제품이고, 장기간에 걸친 능력(엔지니어링 능력과 기획.관리 능력)을 축적하여 품질. 성능, 브랜드파워를 점차적으로 키워야 시장 점유율이 서서히 올라간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규모의 신화, 원가 경쟁력의 신화(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 최신 생산설비. 장비의 신화,(삼성자동차) 한마디로 하드웨어에 대한 신화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적 능력의 축적이라는 정공법으로 승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즉 이들 기업을 경영했던 경영자들의 시야에는 엔지니어들의 노하우의 지속적 축적과 조직화가 경쟁력의 관건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내적 능력 축적이 시장환경과 업종과 기업의 성장발전단계를 초월하여 무조건적인 경쟁력의 요체는 아니다. 사실 한국의 고도성장기는 우수한 제품, 우수한 설비를 농경적 방식으로 일구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사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1955년, 미군 폐차부품과 음성적인 방식으로 빼돌린 부속품에 의존하긴 했지만 상당히 장인 정신이 스며들었던 한국최초의 자동차 회사 ‘시발자동차’가 계속 굴러갔더라도, 1962년에 새나라자동차가 닛산 블로버드를 SKD로 가져와 판매했다면 생존하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발자동차는 1958년에 도산하였다) 1980년 초반의 기아의 봉고신화 역시 장인 정신의 빛나는 승리라기보다는 적기에 적절한 제품을 도입함으로써 거둔 상인정신의 승리이다. 사실 기아의 김선홍씨가 기산과 기아특수강을 인수하는 등, 김우중 회장 같이 문어발 흉내를 낸 것은 그런 상인적 방식이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우중이 1986년 독일 OPEL에서 도입한 월드카 르망을 도입하면서 마켓팅 전략만 제대로 썼다면, 한국 최초의 독자모델인 포니 역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차들이 한참 성장한 2002년 현재도, 일본 닛산의 맥시마 모델인 SM5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선진회사 제품과 기술을 사오는 상인적 방식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엔지니어 홀대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듯 기업의 내적 능력의 핵심인 엔지니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 훈련과 이들이 발휘하는 창의와 열정은, 풍부한 유동성을 기반으로 재벌들의 대대적인 사업 다각화기(확장기)였던 과거 10년동안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기업성장의 엔진은 대체로 금융능력이었고, 도입된 설비 장비를 운전하고 개선하는 생산기술 능력이었다.
필자가 대우자동차를 다니면서 느꼈지만, 대학때 배운 공학지식을 써먹은 곳이 참으로 드물었다. 대학때 배운 것을 다시 들춰보도록 하는 부서도 매우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 회사의 대부분의 직무는 전문대만 나와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자동차 회사 직원이라면 대부분이 갖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엔지니어의 주력부대인 생산기술 엔지니어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제품이나 기술의 성격 자체가 ‘중간기술’이면 충분해서가 아니다. 글로벌 경쟁환경에서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받아내려면 엔지니어들의 평생학습과 이들의 창의와 열정이 관건적 역할을 하지만, 정작 경영자들은 이 시장환경의 변화에 둔감하였던 것이다.
물론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익힌 지식, 기술 자체는 크게 쓸모가 없어도 학습능력이나 상황판단력이나 문제 해결능력 등은 뛰어나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당연히 대졸자를 쓴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자동차 회사는 한국이 이공계 졸업자를 쓸 분야에 전문대 출신이나 현장 출신 기능직을 쓴다. 결국 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안 써도 될 곳에 고급 인력을 쓰거나, 고급인력을 채용해 놓고도 그의 능력을 최대로 개발, 활용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서 연마한 독자 기술에 근거하여 떠오른 벤처기업들이 각광을 받기 전까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NT, BT, IT, CT등의 첨단 기술의 산맥에서 몇몇 봉우리라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이젠 더 이상 선진 기술을 사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기술능력이 규모에 근거한 원가경쟁력이나 강력한 판매네트워크에 기초한 마켓팅 능력보다도 훨씬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엔지니어들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김우중도 '세계경영 기술대우'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실제 그의 머리 속에 있는 ‘기술’은 금융기법과 판매기법과 아웃소싱 기법이었다고 보인다. 이 후과가 바로 지금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엔지니어들의 운명은 과거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불리었던 우수한 공고 졸업생의 운명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
1970년대 말 아마 80년대 초반까지 금오공고니 부산기계공고, 성동기계공고, 유한공고 같은 공고에 대단히 우수한 인력이 모여든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전액 학비 지원에 기숙사 생활(사실상 병영생활이었지만)을 보장해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입학했던 사람들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판단을 내리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은 산업발전 단계나 총수들의 경영스타일상, 또 사농공상의 유교문화 때문에, 지금도 기술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인데, 하물며 20년 전쯤에 ‘기능인’을 사람취급을 했겠는가? 나는 대우자동차에서 근무한 우수한 공고 졸업생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공고에 입학해보니 '단순한 줄질을 시키고 간단한 선반질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것을 보면서 황당해 했고, 그래서 진작에 말로를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뛰쳐나오거나 어렵게어렵게 공부하여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공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이나 간 사람이나 둘 다 피해자였다. 엄밀히 따지면 2~3류 대학에 간 사람들이 더 큰 피해자가 되었다. 공고 졸업생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사람들로 평가받았지만 대기업에서 이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서 늙은 대리 늙은 과장으로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인사평가 과정이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주로 희생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공고 졸업후 현장 기능직에 있던 사람들은 진작에 비전이 없다고 뛰쳐나가서 자영업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고, 노동조합(대체로 대기업에 다녔으니) 운동에 힘입어 정말로 인간다운 생활을 오랫동안 누렸다.
공고나 이공계는 일본이나 독일을 벤치마킹하여 그냥 마구 생산한 것이다. 활용할 능력도 없으면서, 또 활용하기 좋도록 학교에서 제대로 준비시키지도 못하면서, 기업 역시 엔지니어링 능력이 관건이 아니었으면서도 그저 고급인력을 대거 보유하여 이들을 퇴화시켰던 것이다.
이공계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들처럼 관료와 재벌의 무능 때문에, 산업발전 단계 때문에, 과잉 생산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엔지니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도래하자 막상 필요한 소양을 갖춘 엔지니어가 부족해진 듯하다. 엔지니어의 일반적 과잉 속에서 정작 필요한 엔지니어의 태부족 사태가 생긴 것이다 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일반적 과잉과 지엽적인 부족이 동시에 병존한다.
그런데 여기서 변신의 속도 내지 속도를 떨어뜨리는 심리적 저항의 문제가 한국의 이공계에 특수하게 있는 듯하다.
인문. 사회. 경상계열은 원래 전공분야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또 시류에 민감하고 일반적인 것을 추구한다. 사실 인문계의 실업문제는 수십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거론되는 사회문제였는데 요즈음 잠복해 버린 것은 아마 이공계 기피 현상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문계는 유동성과 유연성과 변화가 강조되는 시대에 나름대로 발빠르게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기술은 변해도 사회와 인간과 경제현상이나 금융현상이나 문화현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도 이들의 적응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런데 기술은 원래 우물파고 들어앉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기업들이 이 우물파고 들어앉아 있는 엔지니어들을 잘 찾지 않았고, 고객 요구의 급변 혹은 기술의 급변으로 인해 찾을 일도 없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엔지니어들은 대체로 ‘쟁이’로서 고지식하도록 교육받았다. 스스로 인문적인 소양을 거부하고(이를 정치하다고 질시했다). 우직하고 편협한 것이 엔지니어의 특성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스스로 고지식의 우물에 빠져들어서 기업이나 국가가 응당 전문지식을 써먹어주어야 한다고 우물안에서 일종의 농성을 하는 심리로 기업과 국가를 원망스럽게 보아왔던 것이다. 요컨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을 하는데 있어서 심리적 장애가 인문계에 비해서 훨씬 강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이공계는 홀대받을 짓도 했고, 기업이나 국가 역시 홀대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유와 책임이 어떠하든 이공계의 비인기는 이공계 출신들이 시장에서 별 볼일 없기 때문이다.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던 공고졸업생들처럼 이공계 졸업자들도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기업에서도 사회적으로 홀대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교과과정상의 문제도 있긴 있었다. 공업고등학교의 교과과정이 실무와 괴리되었듯이 이공계의 교과과정도 실무와 유리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경쟁이 없고, 현실의 변화에 둔감하고, 낡은 지식에 안주해도, 얼마든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는 대학의 현실이 있다. 하지만 대학의 책임보다는 대학에 기업 혹은 시장의 니즈를 피드백 시키지 못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시장논리에 따라 굴러가는 사회에서 시장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도록 했으니 대학이 현실로부터 유리되는 것은 당연지사.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의외로 대학교수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것은, 20~30년된 강의 노트로 강의를 해도 통하는 이런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소하는 키는 결국 시장밖에 없다. 병역이니 정부 부문에서 우대니 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수백배 더 강한 힘은 기업들이 과거 성공신화를 오늘의 시장상황과 대비시켜 재검토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기업에서 기술이 사활의 관건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공계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없애는 것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깊은 전문성에 입각하여 인간이나 사회나 경제 경영 영역으로 고민을 넓히는 것은 단순히 교양을 쌓아서 인간의 품격을 높이는 차원이 아니라, 이 시대 기업 경쟁력의 핵심인 기술 관리 혹은 기술(자)관리 능력을 높이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부적응의 산물로서. 기업과 국가와 개인의 공동책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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