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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둥굴레. 뿌리가 음료로 쓰이며, 수난을 겪고 있다. | 봄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산이 풀어 놓는 한 다발의 온갖 산나물들을 밥상에 올려 놓는 일이지요. 겨울이 다지고 간 언땅에서, 마술처럼 되살아나는 들을 바라보노라면, 차라리 물씬 향내가 날 듯합니다.
밭두렁의 냉이를 시작으로 씀바귀, 쑥들이 아직 농사를 시작하지 않은 들에 향기로운 순을 내놓습니다. 그걸 뜯어다 된장 풀고, 올갱이라도 몇 마리 넣고 끓여 놓으면 어른들은 '봄국을 먹는다'고 했지요. 봄을 먹는다는 것,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정겨운 이야기를 저는 물골에 들어와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밥상에 올라 오는 산나물을 먹어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산을 뒤져 뜯어 본 기억은 없던 나도 이제는 몇 개 정도는 주절거리게 생겼습니다. 싸리순, 취나물, 다래순, 홑잎, 두릅, 참나물, 고비...
이런 이름들을 알게 된 것도 사실은 아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가 금세 한 광주리를 뜯어다 점심 상에 올려주시길래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뜯었냐고 물은즉, 바로 우리집 마당 가상이에 널려 있다고 합니다. 으레 산나물이라면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울타리가 바로 그것들이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 분의 말인즉, 봄의 어린 순은 모두 먹을 만하다고 합니다. 나는 그분의 말로, 여름이면 지겹도록 밭에 자라나서 뽑느라 애를 먹이던 망초도 훌륭한 나물이고, 봄이면 한바탕 하얗게 집 주변을 밝히던 나무들도 홑잎이라는 나물이며, 화초로만 알던 원추리의 어린 순도 나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쑥은 지천이고, 봄이 깊어지면서 질경이와 돗나물도 발 디딜 틈없이 길 가상이로 자욱하니 돋아납니다.
| | ▲ 피나물. 손을 꺾으면 핏물 같은 즙액이 나온다고 한다. | 그런데 물골안은 봄만 되면, 이런 나물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지요. 겨우 찬 바람이 가시기가 무섭게, 아침마다 배낭을 둘러맨 노인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데, 조용하던 골짜기가 모처럼 사람 소리로 채워집니다.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이따금 서로 부르는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뵈지 않던 노인들은 저녁이면 배낭을 가득 채운 건 물론이고, 가득찬 마대 자루를 들고 나타납니다.
물골에서는 그분들을 보고, 봄의 깊이를 알 수 있지요. 이른 봄이면 밭 가운데 앉아 있던 그분들이 차츰차츰 산으로 들어서며, 그 높이에 따라 봄도 깊어지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아예 모습이 뵈지 않도록 깊이 들어서면 뻐꾸기 소리와 함께, 봄은 바야흐로 무르익게 되지요.
적적하기만 한 노년에 모처럼 가족들 밥상에 별미라도 올리려는 노인들의 정성어린 일로 보아만 왔던 나는 관광버스까지 대절해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노인들을 어떤 젊은 사람이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재래시장에 전문적으로 나물공급을 하는 업자가 노인들을 일당 얼마씩 주고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산나물들을 뜯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이야기겠지만, 산채가 돈이 되면서 강원도 어느 곳에선가는 외지인들은 아예 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한다니... 뒷맛이 씁쓸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릅의 새순이 나오기가 무섭게 뜯어내는 바람에 막상 마을 사람들도 두릅 구경을 못하고, 순을 따가는 건 뭐라 할 수 없지만, 한 번 순을 잃어 버린 두릅나무가 안간 힘으로 다시 돋구는 순마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으로 훑어가는 바람에 결국 나무마저 죽게 된다면 문제가 조금은 심각하다 할 수 있지요. 어떤 분들은 높이 달린 두릅순을 따려고, 아예 나무 허리를 부러뜨리는 일도 있다더군요.
작년에는 아주머니들이 떼를 지어 우리 집 옆의 골짜기에서 부스럭거리길래 무얼 하냐고 물었더니 둥글레를 뜯는다고 하더군요. 나는 둥글레 잎사귀를 뜯어가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그곳에 가 보니, 잣나무 그늘 밑에 군락을 이루고 자라던 둥글레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둥글레를 뿌리째 뽑아간 것입니다.
게다가 한창 숲이 건조한 시기에 아직 차가운 바람을 피할 양으로 모닥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슬쩍 불똥 한 점만 튀었다하면 순식간에 후루룩 번져버릴 봄 숲을 집 옆에 끼고 사는 나로서는 정말 잠이 안 올 지경이지요. 온통 잣나무로 이어진 산들은 어디서 불이 나건, 속수무책 불구경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형편이니까요.
불 걱정도 걱정이지만, 요기를 하고 난 뒤에 함부로 버린 빵봉지며, 휴지 조각들이 여기저기 바람에 날려다니는 걸 한두 번 치우다 보니 정말 짜증이 나더군요. 그렇다고 일일이 그분들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무어라 한마디하면, 댁의 산이냐며 역정을 내거나, 오늘 처음 온 거라는 말에 기분만 상하고 맙니다.
나물이라는 것이 워낙 잘 자라, 군둥내 나는 묵은 김치로 겨울을 나던 가족들 입맛을 살리기 위해 걷어내는 것이야 능히 감당할 수 있지만, 순 따느라고 허리 굽히기 귀찮아 아예 뿌리째 뽑아들고, 툭툭 흙을 털어내는 식이라면 제 아무리 잘 퍼지고, 잘 자라는 산나물들이라도 어디 견딜 수가 있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아예 중년의 남녀들이 차로 몰려와, 나물을 뜯는가 하더니, 나무 밑에 눌러앉아 화투판을 벌이는 겁니다. 술도 한잔 걸치고, 피박이니 설사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조용하기만 골짜기를 시끌벅적 흔들어놓고는 해가 한참 저물어서야 쓰레기만 남겨 놓고 떠나더군요.
이따금 너무 한적하여 지나는 사람이나 차를 보면 반갑기도 하였지만,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외지 사람만 보면 우선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마을 분들 마음을 이제야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것처럼 좋지 못한 것이 없지만, 사람인 내가 이 지경이고 보면 모처럼 돋아낸 새 순들을 송두리째 잃는 나무들은 어떤 심정일까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댕기머리 처녀들이 가족들에게 신선한 봄나물로 입맛을 되살리게 하던, 봄을 먹는 아름다운 풍경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조금은 우리의 욕심을 덜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대자루로 담아내는 봄이 아니라, 자그마한 소쿠리로도 가득 차는 향기로운 봄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그 동안 <나는 이렇게 시골사람이 되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써왔던 것을 이번 기사부터 <전원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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