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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이인제가 제기한 노무현에 대한 소위 "색깔논쟁"은 많은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인터넷 언론인 "오마이뉴스"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정대화 기자와 김민웅 기자의 글이 크게 다루어진 바 있다.

정대화 기자는 "이인제 후보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색깔 장난' 중단해야할 8가지 이유"라는 다분히 온정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고 김민웅 기자는 "이인제의 정치적 야만과 반역사성"이라는 다소 격한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대화 기자는 이인제의 이념공세를 "색깔 장난"이라고 규정했고 김민웅 기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인제를 "정치적 야만" "반역사성"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논지는 "이념논쟁은 구시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이념"은 (알려진 바처럼) 끝난 것이 아니라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져서 각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혹 우파가 좌파 정책을 펴려고 하면 다음날 우파성향의 신문으로부터 심한 조롱을 받기 마련이고 좌파가 우파 정책을 펴려고 하면 노동자들이 곧 거리로 나와 "좌파(정권) 어디갔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 마련이다. "제 3의 길"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우리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계급분화가 이루어졌음에도 계급의식은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익보다는 지역감정에 기초한 기형적인 투표행태를 계승해왔는데, 이제 그 지역정치의 맹호인 3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시점에서 그들의 그늘인 지역주의적 투표행태의 공백을 메울 대안으로 "이념" 그 자체를 공론의 장으로 올리는 것은 때늦은 감은 있을 정도이다.

이를 위해 후보들 스스로가 소위 "영(호)남 후보론" 등 구시대적인 지역주의 사슬은 끊어버리고 이념과 그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책의 청사진을 국민 앞에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무현 후보가 진작 주장했(다가 지금은 철회했지만)던 "보혁 구도의 정계 개편론"은 실은 역사적인 맥락에 맞는 주장이다.

아직 많은 양심수가 감옥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민주화를 통해 "색깔론을 위한 색깔론"은 상당수 거를 수 있을 만큼 대중의 정치의식이 성숙하였다. 근래 몇번의 선거에서 제기된 "색깔론"은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는 선거결과를 보여주었던 것이 그 반증이다.

사실 "색깔론은 나쁜 것이다"라는 구절만큼 근래 10여 년간 국민의 뇌리에 지속적으로 반복 주입되었던 명제는 없다. 과거에 가장 민감했던 이슈가 더 이상 다락방같이 외진 곳에서 말해지지 않아도 될 만한 一步를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얻어낸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이념논쟁"이 벌어질 좋은 기회와 그 장(場)에서 무조건 "이념논쟁 = 색깔론"의 딱지를 가져다 붙이고 이념논쟁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색깔론의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또한 이전의 "색깔론"이 그러하였듯 역사를 마주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후보에게 다음을 제의하고자 한다.

먼저 노무현에게 바란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이미 지적한 바처럼 노무현의 주요 정책은 여전히 보수색이 강한 민주당보다는 민주노동당에 더 부합한다. 민주노동당은 사회당과 더불어 우리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좌파의 선상에 위치한다. 즉 노무현의 이념적 정체성은 그의 전략적인 부정 또는 침묵과는 달리 "좌파"이다.

따라서 노무현은 정정당당히 커밍아웃하여 적어도 한국사회 안에서는 스스로 "좌파"임을 인정하기를 바란다. 자신을 지지할 유권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직성을 보여주는 것이 수차례 자신해온 "본선 경쟁력"을 보다 투명하게 할 것이다. 물론 일전에 스스로 주장했던 "정계개편론"도 이로 인해 논리적 일관성과 정당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단순히 "귀족 이회창"에 반하는 "서민의 이미지"가 아니라 "서민의 정책"을 갖고 유권자에게 다가갈 때, 선명한 비전을 갖춘 후보가 될 수 있으며 선거에서 이기건 지건 그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힘에서 정책적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기내내 자신의 뚜렷한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DJ정권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을 때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커밍아웃이 아직 자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좌파"의 외연을 넓히는 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좌파"가 한국 현대정치 무대에 최초로 주연급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대 파트너인 "우파"의 발전과 함께 궁국적으로 "민주주의의 기적" 또한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

다음은 이인제에게 바란다.

일단 노무현에 대한 소위 "색깔론" 중 "색깔론을 위한 색깔론"은 접어야 한다. 그리고 진작부터 스스로 밝혀왔듯이 "정책"을 대상으로 한 "이념논쟁"에 몰두하기를 바란다. 노무현의 이념문제를 제기하였으면, "재벌 주식 몰수" 나 "국가보안법 문제" "공기업 민영화 문제"같은 노무현의 과거 주장이 한두마디의 실언이나 상황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럴 수 있을 때에만 그의 "이념논쟁"은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노무현에게 자신의 색깔을 밝힐 것을 요구했듯이 자신도 스스로의 색깔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만일 노무현이 주장하듯 이인제의 정책이 보수적인 민주당 정책보다 더 보수적인 정책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에 훨씬 더 가깝다면, 양당 구조 하에서 스스로 민주당의 대선후보에서 물러나고 경선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정책을 민주당에 가깝게 바꾸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소속 정당과 일치시킨 후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선이 되더라도 개인을 위해서 당 전체가 기존의 정책까지 좌지우지해야 하는 구태의 정치행태가 반복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또 그렇게 될 때 일반국민은 정책상으로 한나라당과 또 다른 한나라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웃지 못할 상황을 강요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취중진담 따로 공식입장 따로"를 반복해온 우파와 좌파가 "이념논쟁"이 촉발된 이참에 이를 정서적으로 악용하거나 또는 반대로 무조건 덮으려 하지 말고 진지하고 생산적인 정책토론으로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실로 민주정당의 정책은 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정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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