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창'이란 이름을 입 밖에 내어 말할 때마다 송이째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 빨간 꽃송이가 먼저 떠오릅니다. 꼿꼿하게 매달려 있다가 한순간, 목숨 다한 듯 떨어져내리는 동백. 5백 살도 넘는다는 선운사의 동백숲이 그리워 해마다 3, 4월이면 남쪽으로 남쪽으로 고개를 젖히곤 합니다.

동백이 활짝 핀 이른 봄을 놓치고, 5월의 고창을 찾았습니다. 12만 평 너른 들이 온통 푸른 보리로 넘실댄다는 그 곳의 이야기를 듣고는 참 많이 그리워했었네요. 꽃도 한 송이보다는 꽃밭을 이룬 것이 더 곱고 화려하기 마련이고, 바닷가 몽돌도 혼자 두고 보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어울려 부딪치는 것이 자그락 자그락 더 고운 소리를 내기 마련이고, 사람이란 것도 혼자 외로이 선 풍경보다는 더불어 얼싸안은 풍경이 더 정겨운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자꾸만 일렁이는 보리밭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고창 보리밭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으로 넘실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차라리 벅찬 감동입니다. 앞서 왔던 사람들이 다녀간 발자국이 보리밭 입구에 가득한데도 농원의 주인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부러진 보리 대궁들을 조심조심 즈려 밟고 저도 열심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5월이면 사진 작가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온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가슴 시리게 푸른 초록의 향연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맙니다.

보리밭이 있는 학원관광농원은 고창군 공음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잔디 운동장도 있고, 과수원도 있다지만 특별히 제 마음에 든 곳은 백민기념관 들어가는 플라타너스 오솔길입니다. 일하는 사람들만 다니는 길인지, 사람들 발길이 드물어 조용한 산책을 하기엔 아주 그만이었거든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누렇게 익을 무렵이면 그 황금빛이 또 그렇게 아름답다 합니다. "우리, 보리 다 익을 때쯤 해서 다시 오자, 꼭!" 뒤뚱대는 꼬맹이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약속하는 아빠의 모습도 정겹습니다. 활짝 피어난 토끼풀꽃이며, 화사한 보라빛으로 시선을 끌어대는 붓꽃들 사이로 참새들이 연신 벌레들을 물어나르는 광경도 보입니다. 이것 참, 눈이 이렇게 횡재하는 날도 있네요.

보리를 심은 곳은 온통 푸른 초록에 갇혀 있고 보리가 자라지 않는 땅은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들 것 같은 황토입니다. 고창의 빛깔이 동백꽃의 선연한 붉은 색, 그 한 가지만이 아닌 줄을 이제야 겨우 알겠더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