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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이 된 할머니 젊은사람만 봐도 무섭다는 백발의 할머니
백발이 된 할머니젊은사람만 봐도 무섭다는 백발의 할머니 ⓒ 박현주
태풍 라마순에 몰려 온 먹구름 속으로 들어갔던 태양이 다시 자리를 찾아 작열하던 7월 7일 일요일 오후, 태풍의 끝자락인지 청명한 바람줄기가 시원하게 불어와 용두동 철거민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무너진 회색 콘크리트 더미가 동산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마치 폭격 맞은 듯 했다. 주택은 폭삭 내려앉아 산산조각 났고, 아직 무너지지는 않아 형체나마 유지하고 있는 집들은 하나같이 창틀이 없다.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살 것을 우려하여 철거반이 창문과 창틀을 모두 부서뜨린 것이다. 주인없는 마당엔 가구며, 가전제품이며, 신발, 책,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팽개쳐있다. 여기는 미국의 폭격을 당한 아프카니스탄도 아니고, 내전을 겪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도 아니다. 이곳은 월드컵을 치른 나라 대한민국의 땅이다. 4천만이 하나되어 외치던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고양이의 천국 용두동 철거지역은 고양이들의 천국이다. 위생문제도 심각하다.
고양이의 천국용두동 철거지역은 고양이들의 천국이다. 위생문제도 심각하다. ⓒ 박현주
폐허는 고양이들의 천국이다. 사람이 사는 곳임에도 검은고양이, 얼룩고양이, 노란고양이 각종 모양새의 고양이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이곳에 남아서 투쟁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위생문제에 대해 걱정한다.

"여기는 소독 안해주는겨? 천지가 고양이 똥인디...."
"중구청에서 우리 얘기 들어주기나 한대요?"

어디 고양이똥 뿐이겠는가. 화장실도 그대로 파묻어버려 악취가 진동한다. 짐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밀어닥친 철거반과 포크레인 때문에 주민들의 생필품들이 모두 저 콘크리트 더미 속에 있다. 냉장고도 통째로 파묻어버려 그 냉장고속에 든 음식이 썩어가고 있을터.

오늘은 일요일이라 늘상 상주하며 위협하던 철거반이 쉬는 날이다. 주민 중 하나가 교통사고가 나서 이곳을 지키던 30-40명의 주민 대분분이 병문안을 가고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노인들이 천막을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철거지역의 발치께에 있는 천막에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있었다. 머리가 호호백발인 할머니는 고통속에서도 미소만큼은 잊지 않았다. 젊은 사람만 봐도 무섭다는 한 아주머니는 몸이 불편에 내과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아주 기절초풍 할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왈,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한단다. 유리깨지는 소리와 고함소리 환청 때문에 괴로웠는데 의사가 정신과 약을 먹을 것을 권유하여 며칠 복용하니 좀 괜찮이지더란다.

노인들의 대화 오른쪽의 할머니는 정신과 치료도 받고있다. 철거환청이 들린단다.
노인들의 대화오른쪽의 할머니는 정신과 치료도 받고있다. 철거환청이 들린단다. ⓒ 박현주
용두동 철거민들의 투쟁은 이렇게 17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이미 집은 무너져내린대다 난폭한 철거반과 몸싸움하랴, 불편한 잠자리 뒤척이랴, 생계걱정하랴 건강은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이틀전엔 철거하청업체 직원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돌아다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주민들이 도끼를 두 차례나 빼앗았지만, 그때마다 새로 사서 들고 왔단다.

거의 40대 이상의 중년이나 60이상의 고령층이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주택공사놈들은 우리가 노인들이니 지쳐서 제풀에 나가떨어지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건강을 지켜야한다고.
7평짜리 집에 살았던 한 아주머니는 내일 일찍 일어날 걱정을 한다. 집이 없어지기 전에는 쪽방에 세도 주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마늘까기를 하여 연명을 하였는데, 지금은 그마저 못하고 새벽부터 나가서 전단지 돌리는 일을 한단다. 그렇게 일하면 한달에 10여만원을 벌 수 있다고… 작년 3월부터 싸워온 이 아주머니는 대전시청 앞마당에 천막농성을 할 때부터 있었다. 비가 오면 천막안으로 물이 들어와 도랑처럼 흘렀노라고 웃으며 말한다.

철거지역의 아기 세살배기 정우는 콘리리트 더미에서 논다.
철거지역의 아기세살배기 정우는 콘리리트 더미에서 논다. ⓒ 박현주
요즘 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뜨개질이 유행이다. 철거하청업체 소장에게 멱살잡이를 당했던 한 아주머니는 그때 다쳤는지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열심히 코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하얀색실로 촘촘하게 뜬 그것은 가방이었다.

"데모하러 댕길 때 메고 갈거유"
"오늘 하루는 잘 살았는데, 낼 아침이 걱정되네유"

용두동을 떠나지 않은 46가구 주민들은 오전 6시 30분이면 움직이는 철거반 때문에 아침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상입주권 보상하라 폐허를 오르는 김창일 간사
무상입주권 보상하라폐허를 오르는 김창일 간사 ⓒ 박현주
일년이 넘도록 주민들은 고립되어 힘겹에 싸워왔다. 주민비상대책위원회를 스스로 꾸려 조야연(43세, 남) 대표를 중심으로 투쟁을 해왔다. 외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

이렇게 버틴 19개월에 대해 대전NCC사회환경위원회의 김규복 목사(빈들장로교회)는 기적이라고 평했다. 다행히 지난 6월부터 '대전지역철거민공동대책위원회(준)'이 꾸려져 실무자가 파견된 상태다. 대전지역 12개의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이 연대기구 김창일 간사는 이번 철거는 헌법에 보장된 거주권과 이주자유권이 침탈받은 사례라고 말한다.

"대전시와 주택공사는 이 지역 주민의 73.6%가 철거에 동의하는 도장을 찍었다고 말합니다. 주민들의 도장을 받는 과정도 사기극에 가깝지요. 주민들에게 현재의 달동네 모습과 고층아파트가 멋있게 서있는 사진 두 개를 보여주며 어떤 것을 택할거냐고 물어봤답니다. 주민들은 당연히 후자를 택했지요. 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보상가를 내놓았습니다. 평당 평균 80만원 보상가를 말이에요.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살던 주민들은 당연히 갈 곳이 없지요. 돈 500-800만원으로 어딜 가서 방을 얻겠습니까?"

대전시는 2003년 9월까지 19곳의 철거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용두동은 처음으로 포크레인이 들어간 곳이다. 주거환경개선이라는 미명아래 가난한 사람들을 턱없는 보상가를 주고 내쫒는 일이 이제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다. 그래서 용두동 주민비상대책위원회는 책임이 막중하다. 이제 철거문제는 용두동의 남은 46가구의 문제가 아니라 가오동, 신흥동 등 대전지역전역으로 퍼져나갈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조야연 주민 대표의 각오도 새로워졌다.

뜨개질 데모하러 갈때 메고 다닐거라며 활짝웃는 아주머니들
뜨개질데모하러 갈때 메고 다닐거라며 활짝웃는 아주머니들 ⓒ 박현주
"용두동 철거 문제는 단순히 보상가 문제가 아닙니다. 처음엔 보상비만 많이 받으면 되는줄 알았는데, 투쟁을 계속 하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빈민을 우롱하는 대전시와 주택공사의 작태, 목숨까지 위협하는 철거업체, 무관심한 대전시와 중구청, 그리고 정당들… 주민대표라고 말하는 구의원, 시의원들이 하나같이 가진 놈들 편이었어요. 앞으로 19곳의 철거대상지역민들이 당할 것이 눈에 선합니다. 용두동 주민들은 대전시민을 위해 싸운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덧붙이는 글 | <용두 제1지구 주민비상대책위원회 활동내용>

 ▶ 2001년 2월 20일    대한주택개발공사에서 보상금 내역을 용두동 주민들에게 통보
                    
 ▶ 2001년 3월 1일     용두동 제1지구 철거민 비상대책위원회 결성.
 ▶ 2001년 5월         중구청 방문 항의.
 ▶ 2001년 6월         시청 방문 항의.
    
    ♠ 용두 1지구 주민 비상 대책 위원회의 요구 사항
    1. 용두동 땅 사업 지구 내 모든 대지는 현 시가인 400-600만원으로 할 것
    2. 용두동 땅 값 보상해준 가격으로 아파트를 분양해 줄 것.
    3. 주택공사는 사업 지구 내 가옥소유자에게 부상 아파트 입주권을 보장 할 것.
    4. 미등기 토지 및 가옥소유자에게 1항, 2항, 3항 과 같이 같은 등급으로 해 줄 것.

 ▶ 자민련 국회의원들과 대전 시장, 청와대에 호소의 글을 보내면서 항의를 계속 함
 ▶ 2002년 3월 19일    전국 철거민 협의회와 공동 투쟁 시작
 ▶ 2002년 3월 21일    행정 대집행으로 강제 철거(생가 19가구 포함 총 50가구) 
                       - 2개 중대의 전경과 300여명의 용역깡패 동원.
 ▶ 2002년 3월 25일    대전 NCC사회환경위원회에서 사실 조사차 방문, 그 후 대전 CBS 방송 등 언론이 적극 보도.
 ▶ 2002년 4월 6일 - 15일까지 MBC PD수첩에서 촬영, 23일 방영, 
 ▶ 2002년 4월 말 건설 교통부에서 지침 하달 - 대한 주택공사는 용두 1지구 사업장 안에 철거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우선적으로 제공할 것.
 ▶ 2002년 5월 6일 보상금의 소액으로 인하여 이주가 곤란한 세대에 대하여 도움을 주고자 계획된 임대 아파트 21-24평형 411호 중 미이주세대주들에게 보다 작은 평형으로 조정하겠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공문서를 보냄.
 ▶ 2002년 5월 14일 건설교통부의 공문서에는 민원을 접수했고, 이 민원에 대해 대한 주택공사와 대전 시청에 검토하도록 회신했다는 내용을 보내옴.
    ※ 주민들이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계속투쟁을 결의함.
 ▶ 2002년 6월 14일 대전 NCC 인권 위원회, NCC사회환경위원회, 용두 1지구 주민 비상대책 위원회의 공동 제안으로 '용두동 등 대전시 재개발 및 주거환경개선사업지역 철거민의 권익보장을 위한 공동 대책 위원회 조직제안서'를 사회, 시민, 종교 단체에 보냄.
 ▶ 2002년 6월 24일 대전지역 철거민 공동대책 위원회(준) 1차 준비 모임에서 총 15개 단체에서 모여서 논의를  했음. (논의 내용은 별첨)
 ▶ 2002년 6월 중순 그 동안 폐기물 처리 업체였던 '필탑'이 나가고, 보증업체였던 '대금'이 철거를 맞았고, 조금씩 용역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해서 철거를 시작했고, 주민들은 이에 대응하고 있다.
 
 ▶ 2002년 7월 1일    대전지역 철거민 공동대책 위원회(준) 2차 준비 모임를 가지고, 상황 대비 임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연락 책임자: 김창일(기독교 노동상담소 실무 간사))
 ▶ 2002년 7월 2일 아침 7시에 포크레인을 앞장세우고, 8명의 인부를 앞장세우고, 철거를 시작하였고, 이에 용두 1지구 주민 비상 대책 위원회 주민들과 대전 지역 철거민 공동 대책 위원회 참가단체들이 모여서 막았음.
▶ 2002년 7월 2일  저녁에 전국 철거민 연합회에서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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