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5백년. 왕조의 역사가 길면 화려한 역사도 있게 마련이지만 비통한 모습 역시 갖게 되는 것이 이치인가 보다. 조선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경복궁엘 가면 이러한 영욕이 교차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다.
전각들은 다 어디 가고 마치 사람의 무덤 위에 떼를 입혀 놓은 것처럼 허허벌판에 잔디밭 널따란 경복궁을 거니노라면 이러한 감정은 더욱 격앙되게 된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비극의 현장을 찾아가려 한다. 그러니 일단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긴 터널을 지나 중앙박물관 앞에 서자. 곧 용산 미군기지 앞으로 이전하게 될 중앙박물관. 그리로 옮기면 이 모습도 이젠 그만이니 다시 한번 봐두는 것도 좋겠다. 물론 외양에서 그 어떤 멋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답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중앙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으로 화려한 몸돌을 가진 부도가 한 기 놓여 있다. 알기로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일종의 무덤이다. 마치 탑이 부처의 진신사리나 불경 등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부도가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왕궁 안에 있는 걸까. 왠지 어색하다. 물론 이것뿐만 아니다. 경복궁이나 창경궁, 어느 궁궐엘 가도 석탑이나 불상을 보는 게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극의 시작은 이렇다. 일제는 조선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는 동시에, '아직 깨이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앞선' 과학기술과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이하 공진회)', 소위 엑스포를 연다. 그 장소는 상징성도 강할 뿐만 아니라 조금만 손보면 멋진 '전시용 부스'로 바꿀 수 있는 건물들이 있는 경복궁으로 결정된다. 이에 궁궐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물들을 하나둘 철거하고 거기에 공진회를 위한 전시 시설을 들이게 된다.
그런데 어느 행사든 사람들의 편안한 관람을 위해 조경에 신경을 쓰는 법. 이에 일제가 택한 방법은 건물을 헐어 널찍한 공간을 확보한 뒤 거기에 떼를 입혀 땅을 질척거리지 않게 하고, 조선땅 각지에 있는 희귀한 불상이나 탑, 부도 등을 옮겨오는 것이었다. 옮겨온 석조물들은 때론 분수대의 중앙에 서서 물을 뿌리는 역할을, 때론 부스와 부스 사이에 서서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로 전락을 하게 된 것이다.
'비극은 비극'이고 '답사는 답사'이니 만큼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 시킬 겸, 이제 부도 하나하나에 눈을 돌려보자. 먼저 중앙박물관 정문 계단 오른쪽에 있는 부도는 흥법사 진공대사탑이다. 이름에는 '탑'자가 들어갔지만 이는 엄연한 부도다. 1931년 강원도 원주 흥법사 터에서 이사온 이 부도는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때의 것이어서 그런 지 중대석에 있는 빼어난 용과 구름이 뒤섞인 조각 등 그 장식성이 단연 압권이다.
한편 흥법사 진공대사탑보다도 훨씬 화려한 부도가 있으니 경복궁 서쪽 출입구 안쪽에 있는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 그것이다. 이 부도를 보고 있으면 너무도 화려해 자칫 그 아름다움에 취해 버릴 정도다. 이 부도는 8각 원당형이라는 일반적인 부도의 모습과는 달리 기단부나 탑신부 모두 4각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어서 상층 기단부에는 마치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라도 되는 양 멋들어진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상륜부 모서리의 가릉빈가나 연화문, 보살상 등과 같은 조각들은 부도를 한층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한편 탑신부에는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같이 문고리가 달린 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목조 건물을 모방한 예로, 그 안에 승려의 사리기 등이 안치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특히 이 부도는 1912년에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반송된 것이어서 그 느낌 다른 부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와는 달리 8각 원당형이라는 공식에 잘 부합하는 부도도 있다. 역시 경복궁에 있는 전 흥법사 염거화상탑이 그것인데, 우리 나라 부도 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 전(신라 문성왕 6년인 844년에 만들어짐)에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흥법사에서 가져온 것으로 믿고는 있지만 그 기원이 확실치 않은 이 부도는, 목조 건물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탑신부 앞뒤에 각각 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특히 옥개석의 윗부분엔 기왓골이 아주 선명하고 아랫부분에도 서까래를 표현하는 등 부도가 처음에는 목조 건물에서 유래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 흥법사 염거화상탑의 경우 기단부의 밑 부분과 상륜부가 소실되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면 1919년 경남 창원 봉림사터에서 옮겨온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봉림산문을 연 진경대사의 부도로, 상·중·하대석의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가 잘 남아 있다. 다만 그 절제되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듯한 모습이 경복궁의 여느 부도들과는 다른 맛을 풍긴다.
한편 부도의 '이사'가 비단 일제에 의해서만 일어난 일은 아닌 듯 하다. 흥법사 진공대사탑 오른쪽에 위치한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은 1948년에 경복궁으로 이전되었는데, 아직도 강원도 원주 거돈사터에는 탑비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부도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경복궁에 있는 부도들이 있던 원래의 절들은 현재 대부분 스산한 바람이 부는 폐사지가 된 지 오래여서, 솔직히 다시 옮겨 놓는다한들 반겨줄 식구가 없기는 경복궁이나 거기나 마찬가지다. 또한 다시 이전할 경우에 드는 비용이나 관리에 따르는 중복된 노력 등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차라리 중앙박물관도 이전하는 마당에 일제 시대 이후 전국에서 수집되어 서울로 반출된 부도와 부도비 등을 모아 '일제시대 부도 수난 박물관' 등을 건립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승려들의 부도가 이곳 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퍼져 있어 이를 한곳에 모아 사람들로 하여금 답사할 수 있고, 한번에 부도의 변천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의의가 있을 것이며,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왕궁에 부도가 한 기도 아니고 여러 기가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은 왠지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신촌클럽(www.shinchonclub.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