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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저께 저녁의 일입니다. 성당을 짓느라고 교우들이 바자회를 한다고 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아내와 딸아이랑 가서 저녁을 먹고 왔습니다. 집에 와 깨끗하게 씻은 뒤 아버지 방문을 열었더니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습니다.

때때로 화면에 볼 만한 것이 있으면 아버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날도 쪽을 찐 여인 두 명이 나온 것이 관심을 끌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는 '이것이 인생이다'인데, 천사같이 산 한 여인의 일생을 극화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딸아이가 들어와 아빠 옆에 앉았습니다. 곧 이어 아내도 들어와 아버지 소파 손 놓는 곳에 앉아 보았습니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녀석도 바자회에서 사온 김밥을 들고 들어와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혼자서 보던 것이 가족 모두가 보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남자와 혼인한 여자, 나중에 밝혀진 전처의 생존과 기막힌 동거, 자식을 낳지만 전처가 엄마라고 하고 키우고 그녀는 행상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슬프면서도 마냥 따뜻함을 전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처도 후처도 마치 자매처럼 지내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습니다.

프로가 끝났을 때에 진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전처를 '엄마'라고 부르며 가정의 행복을 위해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희생한 그녀의 삶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작년 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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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다른 여인들처럼 어머니도 고통과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15세에 시집와서 전혀 경제력이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만 당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시부모는 그런 며느리에게 잘해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나이 어린 며느리의 마음은 딴 곳에만 가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만주에 계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시부모가 보내주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는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시부모가 보내주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아들 때문에 걱정 속에서 생활한 시부모는 며느리가 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선 못할 일인 줄 알면서 울부짖는 며느리를 끝끝내 친정아버지 장례에 보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자식을 낳았습니다.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았습니다. 불쌍한 시부모를 위해 나가겠다는 생각을 다 버리고 오직 시부모와 자식들을 보며 억척스럽게 생활했습니다. 그제야 시부모도 며느리가 마음을 고쳐잡았다며 안심을 하고 마음 고생을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텔레비전 극에서 주인공인 그녀가 나중에 전처가 왔을 때에 속았다며 집을 나가려고 수없이 시도했을 때에 마음씨 착한 전처가 피눈물로 호소합니다. 같이 지내자고 합니다. 자식을 못 낳아 20여년간을 핍박 속에서 살아온 자신을 봐서라도 용서하고 같이 지내자고 호소합니다. 그 말에 그녀는 나가지 않고 아들 딸 낳으며 열심히 살아나갑니다.

너무나 많이 부족한 남편인지라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서 솜을 틀며 4남매를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생활에 도움이 전혀 되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을 여러 번 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힘들게 살아온 삶을 아는 우리 4남매는 어머니께 잘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처럼 하루 일을 다 끝내고 방안에 모여 오순도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옛날의 그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시부모가 보내주지 않아서 못간 이야기, 시부모가 불쌍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산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우리들은 어머니가 참으로 고난의 아픈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해드렸습니다.

"엄마가 그때 만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잖아요. 엄마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아픔을 견뎌내고 여기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태어났잖아요. 엄마도 그때는 고생이 되었지만 지금 우리 4남매를 보면 흐뭇하시지요."

어머니는 장남인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지으셨습니다. 그때의 어머니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나의 그 말은 정말입니다. 엄마가 아빠와 살았기에 우리 4남매가 태어났습니다. 만약에 엄마가 가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언제 그렇게 어머니께 말씀 드렸는지 모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내게 행복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열아,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적이 언젠지 알고 있니? 너, 생각이 나는 줄 모르겠구나. 언젠가 네가 나에게 말했었지. '엄마가 만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이 태어나지 못했잖아요. 비록 할아버지와 할머니 때문이지만 가지 않고 여기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태어난 것이잖아요'라고 말할 때였단다. 그 말을 네게서 듣는 순간 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가장 행복한 엄마가 되었단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하시면서 지금까지 힘들게 수십 년을 살아온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보람 있는 것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나도 어머니께 그 말을 들으며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텔레비전을 보며 어머니의 인고의 삶이 생각났습니다. 부부애를 모르며 살아야 했던 슬픈 인생이었습니다. 오직 시부모 생각에 자식 생각에 온갖 고통 견디며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홀로 된 아버지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정성 들여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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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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